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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백석 시인 / 허준 (許俊)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30.

백석 시인 / 허준 (許俊)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뒷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하늘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깨쭉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詩人)은 안다

'도스또이엡흐스키'며 '조이스'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 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모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량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마람은 모든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둑판을 당기는구려

 

 


 

 

백석 시인 /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시인 / 적경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끊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백석 시인 /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 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백석 시인 / 호박꽃 초롱

 

 

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벗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툼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백석(白石) 시인 (1912.7.1~1995)

본명 백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