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허준 (許俊)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뒷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하늘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깨쭉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詩人)은 안다 '도스또이엡흐스키'며 '조이스'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 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모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량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마람은 모든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둑판을 당기는구려
백석 시인 /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시인 / 적경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끊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백석 시인 /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 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백석 시인 / 호박꽃 초롱
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벗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툼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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