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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용악 시인 / 전라도 가시내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

이용악 시인 /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네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랑캐꽃, 아문각, 1947>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시인

1914년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일제시대 조선인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개인적 체험에서 오는 구체성과 합친 시들을 발표.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 1949년 8월 경찰에 체포된 후 10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출옥 후 월북. 1971년 북한에서 폐병으로 작고. 시집으로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이 있음. 1957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리용악시선집』을 펴냄. 중앙신문 기자, 문화일보 편집국장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