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시인 /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네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랑캐꽃, 아문각,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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