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꿈길
물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밤 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 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 봄 거츠는 꿈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꿈 꾼 그 옛날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 아래로는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 타고서 오신 그 여자는 내 꿈의 품 속으로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베개는 눈물로 함빡히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는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 그림자 하나가 창 틈을 엿보아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나이 차지면서 가지게 되었노라 숨어 있던 한 사람이, 언제나 나의, 다시 깊은 잠 속의 꿈으로 와라 불그레한 얼굴에 가늣한 손가락의, 모르는 듯한 거동도 전날의 모양대로 그는 야젓이 나의 팔 위에 누워라 그러나, 그래도 그러나! 말할 아무 것이 다시 없는가! 그냥 먹먹할 뿐, 그대로 그는 일어라. 닭의 홰치는 소리. 깨어서도 늘, 길거리의 사람을 밝은 대낮에 빗보고는 하노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꿈자리
오오, 내 님이여? 당신이 내게 주시려고 간 곳마다 이 자리를 깔아 놓아 두시지 않으셨어요. 그렇겠어요 확실히 그러신 줄을 알겠어요. 간 곳마다 저는 당신이 펴 놓아 주신 이 자리 속에서 항상 살게 되므로 당신이 미리 그러신 줄을 제가 알았어요.
오오 내 님이여! 당신이 깔아 놓아 주신 이 자리는 맑은 못 밑과 같이 고조곤도 하고 아늑도 했어요. 홈싹홈싹 숨치우는 보드라운 모래 바닥과 같은 긴 길이, 항상 외롭고 힘없는 저의 발길을 그리운 당신한테로 인도하여 주겠지요. 그러나 내 님이여! 밤은 어둡구요 찬바람도 불겠지요. 닭은 울었어도 여태도록 빛나는 새벽은 오지 않겠지요. 오오 제 몸에 힘 되시는 내 그리운 님이여! 외롭고 힘없는 저를 부둥켜안으시고 영원히 당신의 믿음성스러운 그 품속에서 저를 잠들게 하여 주셔요.
당신이 깔아 놓아 주신 이 자리는 외롭고 쓸쓸합니다마는, 제가 이 자리 속에서 잠자고 놀고 당신만을 생각할 그때에는 아무러한 두려움도 없고 괴로움도 잊어버려지고 마는데요.
그러면 님이여! 저는 이 자리에서 종신토록 살겠어요.
오오 내 님이여! 당신은 하루라도 저를 이 세상에 더 묵게 하시려고 이 자리를 간 곳마다 깔아 놓아 두셨어요. 집 없고 고단한 제 몸의 종적을 불쌍히 생각하셔서 검소한 이 자리를 간 곳마다 제 소유로 장만하여 주셨어요. 그리고 또 당신은 제 엷은 목숨의 줄을 온전히 붙잡아 주시고 외로이 일생을 제가 위험 없는 이 자리 속에 살게 하여 주셨어요.
오오 그러면 내 님이여! 끝끝내 저를 이 자리 속에 두어 주셔요. 당신이 손수 당신의 그 힘 되고 믿음성부른 품 속에다 고요히 저를 잠들려 주시고 저를 또 이 자리 속에 당신이 손수 묻어 주셔요.
19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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