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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지용 시인 / 국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

정지용 시인 /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

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

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

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 분틀: 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 큰마니: 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재치기

* 댕추가루: 고추가루

* 탄수: 석탄수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 아랫목 //

* 고담(枯淡): (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정지용 시인 /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

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정지용 시인 /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거랑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짖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정지용 시인 /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 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시인

1902년 충북 옥천 에서 출생. 휘문고보 재학 시절《서광》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음.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 해방이 되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기록되어 있음.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문학독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