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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후 시인 /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1.

김경후 시인 /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리고 내 말은 너의 입으로 간다

 

  이빨에 말 몇 점 찢겨 걸린 채

  입은 급하게 닫힌다

  습하고 어두운 속을 지난 말들,

  목구멍에 기대 무성영화를 보고 있다

  가끔 네 입이 열리면 나의 말 혹은 그 부스러기

  스크린에 비치기도 하지만

  식도에서 끈끈한 양상추를 건져

  너덜대는 모습을 가릴 수 있다

 

  미끄러져 어딘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위장까지 내려가면 누구나 그렇게 되니까

  머리 없이 끊, 어, 진, 단음절

  말의 살점들 위로 다시 영사기가 돌아간다

  무언가 보이겠지

  소리 없이

  네 말은 이빨 밖에 있고

  내 말은 없다

  하지만 네 속에 이미

  내 말의 뼈 녹아 있다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 2001) 중에서

 

 


 

 

김경후 시인 / 입술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월간 『현대시』 2012년 3월호 발표

 

 


 

김경후 시인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 200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