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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세영 시인 / 신년송(新年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9.

박세영 시인 / 신년송(新年頌)

 

 

붉은 해 동이 터 오고

새벽닭이 울었다 새해오리까

아니 한 바퀴 해가 돌았으니 새해오리까?

 

복조리 사라 외치니 새해오리까

호사한 아기들 새배하러 오고가며

널 뛰는 색씨 붉은 댕기 날리니 이 또한 새해오리까?

 

새해거든 새 맘이 깃들어야지

그 마음 아직도 묵고 녹슬어 못 믿을 건 내 맘이라면서도

내 어찌 새해라 외치오리.

 

해마다 새해라 마음 단단히 먹어 보건만

날이 갈수록 그 마음 연기같이 사라지나니

내 어찌 새해라 반기오리

 

허나 이 해만은 내 또 마음의 새싹을 틔워

따스한 봄날에 꽃을 피우고

녹음방초 저 여름을 지나거든 열매를 맺어 보련다

그러면 이 해엔 풀어졌던 이 내 맘을

달구고 달구어 떠오르는 저 해에 머리를 숙이어

내 기어이 마음의 새해를 지어 보련다

 

삼천리, 1937. 1

 

 


 

 

박세영 시인 / 아―여기들 모였구나

 

 

누가 부르더냐,

해 지는 저녁 거리로,

밀물처럼 몰려드는 시민들은

많은 돈을 내고,

왜놈의 넋을 사러 왔다.

 

성장(盛裝)한 처녀, 신사, 숙녀, 모리배들,

그리고 눈 정기(精氣) 없는 청년, 학생들이

미친 사람처럼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창경원으로, 요마(妖魔)의 비원(秘苑)으로.

서른 일곱 살 된 사꾸라가

악독한 주인을 잃어,

이제 섬나라를 그리워할 때,

네 주인 섬기던 우리들 왔으니

이 한밤이나 즐겨 보자는 겐가.

 

엊그제는 금방(今方)에 독립을 달라고,

저자를 들이고, 인경을 치고,

가장 애국자인 양

태극기를 휘두르던 그대들이

그 넋은 어데다 던져 버리고,

이제 모조리 여기 왔는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기에

뜨거운 마음이 복받쳐 나와,

기름때 묻은 옷, 헐벗은 옷대로,

민주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나가던

그 거룩한 민족의 산 행렬에,

해방을 놀던 그대들이

아 모조리 여기 왔구나.

 

누가 부르더냐,

미친 얼빠진 사람처럼 달리는 사람들이

다음날엔 섬나라 길야산(吉野山)에까지

찾아라도 갈 사람들이,

이 한밤, 아니 다음날에도,

독립은 외치면서

참 독립을 알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 모조리 여기 모였구나.

답답하다 나는 가슴을 치며 울고 싶고나.

 

문학, 1946. 7

 

 


 

 

박세영 시인 / 양자강

 

 

흐리고나 바단가 싶은 이 강물은

어지러운 이 나라처럼,

언제나 흐려만 가지고 흐르는구나,

 

옛날부터 흐리고나, 이 강물은

그래도 맑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이 나라 사람의 마음이 되었구나.

 

해는 물 끝에 다 갈 때,

물은 붉은 우에 또 붉었다,

아직도 남은 배란 윗물에 나부끼는 돛단배 하나.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朴世永.1902.7.7∼1989.2.28)

시인. 호는 백하(白河). 경기도 고양 출생.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송영(宋影) 등의 동기생들과 함께 소년문예구락부를 조직하고 동인지 [새누리]를 펴냈다. 졸업 후 중국으로 건너가 송영 등이 주도한 사회주의 문화단체인 염군사에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가담했다. 1924년 귀국한 박세영은 이호ㆍ이적효 등과 교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을 했으며,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편입하고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월북한 뒤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부장 등을 거쳐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7년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작품 활동은 1927년 [문예시대]에 <농부 아들의 탄식> <해빈의 처녀> 등을 발표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작품으로 <산골의 공장>(신계단.1932.11) <산제비>(낭만.1936.11) <위원회 가는 길>(우리문학.1946.1) 등이 있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산제비> <오후의 마천령> <타적>등이 있다. 1959년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한 공로로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