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求)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伊太利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事物)의 생리(生理)와 사물(事物)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事物)의 우매(愚昧)와 사물(事物)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
김수영 시인 / 구라중화(九羅重花) 부제 : 어느 소녀에게 물어보니 너의 이름은 그라지오라스라고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
눈에 걸리는 마지막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듯 영롱한 꽃송이는 나의 마지막 인내(忍耐)를 부숴버리려고 한다
나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마지막 붓을 든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時代)를 진지(眞摯)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恥辱)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하는 나의 붓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恥辱)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기에 (아아 그러한 시대(時代)가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의 동요(動搖)없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 한번 치어다보고 혹은 내려다보면서 무량(無量)의 환희(歡喜)에 젖는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 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놓고 고즈너기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현대(現代)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있는 인내(忍耐)와 용기(勇氣)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물이 아닌 꽃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生死)의 선조(線條)뿐 그러나 그 비애(悲哀)에 찬 선조(線條)도 하나가 아니기에 너는 다시 부끄러움과 주저(躊躇)를 품고 숨가뻐하는가
결합된 색깔은 모두가 엷은 것이지만 설움이 힘찬 미소와 더불어 관용(寬容)과 자비(慈悲)로 통하는 곳에서 네가 사는 엷은 세계(世界)는 자유(自由)로운 것이기에 생기(生氣)와 신중(愼重)을 한몸에 지니고
사실은 벌써 멸(滅)하여 있을 너의 꽃잎 우에 이중(二重)의 봉오리를 맺고 날개를 펴고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 구라중화(九羅重花)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김수영 시인 / 구슬픈 육체(肉體)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調和)와 영원(永遠)과 귀결(歸結)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大地)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不屈)의 의지(意志)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天上)의 무슨 등대(燈臺)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海底)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調和)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天使)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肉體)여.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시인 / 국립도서관(國立圖書館)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우열(優劣)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구태여 달관(達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 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冒瀆)당한 과거(過去)일까 약탈(掠奪)된 소유권(所有權)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學徒)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年齡)의 넘지 못할 차이일까……
전쟁(戰爭)의 모든 파괴(破壞) 속에서 불사조(不死鳥)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 우주(宇宙)의 파편(破片)같이 혹(或)은 혜성(彗星)같이 반짝이는 무수(無數)한 잔재(殘滓) 속에 담겨있는 또 이 무수(無數)한 몸뚱아리―들은 지금 무엇을 예의(銳意) 연마(硏磨)하고 있는가
흥분(興奮)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生理)와 방향(方向)을 가리지 않고 서있는 서가(書架) 사이에서 도적(盜賊)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다보는 저 흰 벽(壁)들은 무슨 조류(鳥類)의 시뇨(屎尿)와도 같다
오 죽어있는 방대(尨大)한 서책(書冊)들
너를 보는 설움은 피폐(疲弊)한 고향(故鄕)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예언자(預言者)가 나지 않는 거리로 창(窓)이 난 이 도서관(圖書館)은 창설(創設)의 의도(意圖)부터가 풍자적(諷刺的)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김수영 시인 /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狂氣)― 실망(失望)의 가벼움을 재산(財産)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歷史)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財産)으로 삼았다
혁명(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意志)의 잔재(殘滓)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落書)를 잃고 기대(期待)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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