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시인 / 월야(月夜)의 계명사(鷄鳴寺)
서투른 단소 소리가 석계(石階)에서 고요히 떨리니, 건너편 죽림은 푸시시 웃는다.
아련한 길 우에 푸른 옷들은 큰길로 나서다, 단소 소리는 울리고 절 안의 개는 짖을 때.
장자방(張子房)의 단소 소리에 초진(楚陣)이 흩어진 때는 지금 이 절과 죽림도 없었으련만 산(山)은 아무 말 없는데도 죽림은 푸시시 울고, 개는 짖는다.
높고 흰 벽(壁)은 산듯이도 비쳐, 옛만 꿈꾸는 금릉성(金陵城)을 내려본다. 노승이 나와 문(門)을 열고 맞을 때, 분향의 냄새와 인조(人造)의 신비가 넘치는 곳에는 거칠은 신발 소리가 나다, 천원(天園)의 착란자같이도.
모든 것이 이 세상은 아닌 듯, 승(僧)도 집도 모두 다― 그러나 거울 같은 호수에는 달빛이 고이도 비치라, 다상(茶床) 늘어 논 이 누상(樓上)에서 나는 고성(古城) 너머 빛나는 호수(湖水)만 바라본다.
그대와 나는 기쁨에서 노래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이 고도! 혼수에 빠진 이 대륙은 깰 날이 아득하구료.
전국에 횡행하는 군벌이 없어지기 전에는 몇백 년이 또 지나도 변함이 없겠습니다, 당신이 듣듯이 음조 높은 나팔 소리는 모이라는 명령인가 보이다, 재물을 꿈꾸는 병사에게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요.
당신은 현상을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고도, 몇 백년을 나와 함께 꿈꾸었지요.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은폭동(隱瀑洞)
녹음이 짙어진 쨍쨍한 여름, 물소리 귀를 울려 갈 곳조차 잊을 듯.
속리(俗離)의 골짜기를 몇번 굽어 석굴(石窟)에서 그치면, 탐조등의 광선같이 가는 줄이 둬 가닥, 그래도 골 속은 그대의 얼굴을 알아보겠다.
울퉁불퉁 돌 끝이 솟은 밑바닥, 물방울은 뚝뚝 떨어져, 나의 기억을 창조기(創造期)로 이끌어간다.
소리는 대지의 밑바닥까지 뚫을 듯 울리건만, 그 깊이는 얼마인고, 비스듬히 폭포를 비춰주는 이것은 은하, 일찍이 산간에서 보던 모든 폭포도, 이렇듯 맑지도 희지도 못했을 것이다.
희다 희다 못하고, 밝다 밝다 못하여 하늘의 모든 별을 몰아다 쏟는 듯이 눈이 부신 물의 곡선, 아―내려갈수록 검어지는 그림 같은 이 폭포야말로, 은사(隱士)와 같구나. 그리하여 네 아름다움과, 그 장엄하고 신비함을 어둠의 골로 담아 버리는구나.
산만치 무거운 침착(沈着), 바다만치 깊은 겸양, 그리고 하늘만치 높은 네 고결은, 나의 홑껍데기 처녀술(處女術)을 모조리 씻어 보내련다, 가면의 분(粉)가루를 날려 보내련다. 섬광이 빛나는 물의 곡선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 같구나.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잃어진 봄
그렇게도 고운 봄은 웃음의 빛을 퍼뜨려 누구나 오라건만 나는 다만 한숨을 쉰다 잊히지 않는 지난날을 생각하고.
오는 봄날엔 그대와 같이 꽃 찾아 가자던 언약도 이제 와선 어디론지 날아가 오늘에 남은 것이란 폭풍우 끝에 낙숫물 소리.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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