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 기도(祈禱) 부제: 사․일구(四․一九)순국학도(殉國學徒)위령제(慰靈祭)에 붙이는 노래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革命)의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大自然)의 법칙(法則)을 본받아 어리석을만치 소박(素朴)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海底)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殺人者)와 강도(强盜)가 남아있는 사회(社會) 이 심연(深淵)이나 사막(砂漠)이나 산악(山岳)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社會)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 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罪)있는 몸의 억천만 개의 털구멍에 죄(罪)라는 죄(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시인 / 꽃 2
꽃은 과거(過去)와 또 과거(過去)를 향(向)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種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歸結)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瞬間)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內面)은 완전(完全)한 공허(空虛)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中斷)과 계속(繼續)의 해학(諧謔)이 일치(一致)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에 통(通)하는 꽃 견고(堅固)한 꽃이 공허(空虛)의 말단(末端)에서 마음껏 찬란(燦爛)하게 피어오른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시인 / 꽃잎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시인 /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時間)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偶然)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돌아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싫은 노란 꽃을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시인 /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야 손들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빵! 빵! 빵! 빵! 키크야! 너는 저놈을 쏘아라 빵! 빵! 빵! 쨔키야! 너는 빨리 말을 달려 저기 돈보따리를 들고 달아나는 놈을 잡아라 죠ㄴ! 너는 저 산 위에 올라가 망을 보아라 메리야 너는 내 뒤를 따라와
이 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다 한데다 묶어놔라 애 이 놈들아 고갤 숙여 너희놈 손에 돌아가신 우리 형님들 무덤 앞에 절을 구(九)천육(六)백삼십오(三五)만번 만 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두목! 나머지 놈들도 다 잡아왔습니다 아 홍찐구 놈도 섞여있구나 너 이 놈 정동 재판소에서 언제 달아나왔느냐 깟땜! 오냐 그놈들을 물에다 거꾸로 박아놓아라 쨈보야 너는 이성망이 놈을 빨리 잡아오너라 여기 떡갈나무 잎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와이 영사한테 보여라 그리고 돌아올 때는 구름을 타고 오너라 내가 구름운전수 제퍼슨 선생한테 말해놨으니까 시간은 이(二)분 밖에 안 걸릴 거다 이 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지 이 놈들 여기 개미구멍으로 다 들어가 이 구멍으로 들어가면 아리조나에 있는 우리 고조할아버지 산소 망두석 밑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 쨈보야 태평양 밑의 개미 길에 미국사람들이 세워 놓은 자동차란 자동차는 싹 없애버려라 저 놈들이 타고 들어가면 안된다 야 빨리 들어가 하바! 하바!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아리조나 카보이야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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