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시인 / 전원의 가을
하늘은 왜청 같이 파랗고, 들은 금같이 누른데, 바람이 이네, 물결을 치네 아―나는 거기 살고 싶네.
씻은 듯 하늘은 맑고, 이삭은 영글어 바다 같은데, 야국(野菊) 핀 언덕 밑, 맑은 개울로, 왜가리 한아리 거닐고 있어 홀로 가을을 즐기는 듯, 전원의 가을은 곱기도 하여라.
바람결에 스치는 벼향기, 목메어 새쫓는 애들의 소리, 평화한 가을의 전원은 모든 사람을 오라 부르나, 못 살아 흘러 간 마을 사람도 다시 오라 부르나!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처녀동(處女洞)
조약돌 씻으며 흘러내리는, 시내 끼고 올라가면 잣봉산 기슭이다.
응달이 져서 으슥한 골짜기엔 깊고 얕게 고이 흐르는 물, 세상에선 아끼는 물이라.
찌는 볕이 지나도 보이는 사람은 없이 돌 씻는 소리만 나라, 물길은 굽어 내리고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침향강(沈香江)
당긴 활등 같이 굽이 흐르는 침향강(沈香江), 신륵사 새벽종에 잠을 깨는 침향강(沈香江), 몇 만년 푸른 물이 흘렀으련만 지금은 흐렸구나.
새 보금자리와 같이 강강의 줄버들에는, 마른 풀이 말리어 올라가도 쓰러질 듯이 버티고만 섰다. 푸른 버들은 왕도(王都)를 지키는 근왕병같이도, 이 조그만 마음을 지키고 있구나.
강가에서 볏섬을 거들어주는 아낙네, 이삭벼를 값으로 줍는 그들 물끄러미 떠나는 배를 바라본다.
해마다 얼마나 많은 볏섬이 너에게서 흩어지는가, 조그만 강(江)이로되 기름진 윗벌의 곡식이란 네가 날랐다. 그러나 지금은 거칠어가는 고향을 버리고, 마을의 처녀들이 이 강으로 흘러간다구,
침향강(沈香江) 푸른 물아, 너는 너의 비밀을 말하여다구, 나일강보다도, 라인하(河)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너를 한갓 전설의 강으로 만들려는 동리사람을, 너는 노한 눈으로 보는가! 네가 숨기고 있는 보물을, 침향(沈香)목(木)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가지려는가.
너의 보물을 빼앗으려면 구름은 모이고, 번개는 번쩍이어 벌을 준다니, 너는 사람을 웃으리라, 네게도 로렐라이가 숨었다고 너를 마(魔)의 강(江)으로 만들려는 인간(人間)을.
그렇다면 네 침향강(沈香江)은, 늙은 농부의 울음을 울리는 원한 실은 배는 흘려 보내지 말아라. 고향을 안타까이도 버리는 저들을, 푸른 강아 보내지는 말아라.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랑 시인 / 망각 외 3편 (0) | 2019.10.31 |
---|---|
김수영 시인 / 나의 가족(家族) 외 4편 (0) | 2019.10.31 |
김영랑 시인 / 눈물 속 빛나는 보람 외 4편 (0) | 2019.10.30 |
김수영 시인 / 기도(祈禱) 외 4편 (0) | 2019.10.30 |
박세영 시인 / 월야(月夜)의 계명사(鷄鳴寺) 외 2편 (0) | 2019.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