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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수영 시인 / 나의 가족(家族)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1.

김수영 시인 / 나의 가족(家族)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新鮮)한 기운(氣運)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이 흘러갔던가

파도(波濤)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世代)를 가리키는 지층(地層)의 단면(斷面)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家族)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家族)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書冊)은

위대(偉大)한 고대조각(古代彫刻)의 사진(寫眞)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聖)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宇宙)의 위대감(偉大感)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刺戟)을

나의 가족(家族)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比)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이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不自然)한 곳이 없는

이 가족(家族)의 조화(調和)와 통일(統一)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偉大)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柔順)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罪)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房)안에서

나의 위대(偉大)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시인 / 누이야 장하고나!

 

 

누이야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

너의 방에 걸어놓은 오빠의 사진(寫眞)

나에게는 「동생의 사진(寫眞)」을 보고도

나는 몇번이고 그의 진혼가(鎭魂歌)를 피해왔다

그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진혼가(鎭魂歌)가 우스꽝스러웠던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그 사진(寫眞)을 십(十) 년만에 곰곰이 정시(正視)하면서

이내 거북해 너의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십(十)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傷處)를 다스리기엔 너무나 짧은 세월(歲月)이다

 

누이야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팔월(八月)의 하늘은 높다

높다는 것도 이렇게 웃음을 자아낸다

 

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

나의 습관(習慣)이니까

동생뿐이 아니라

그의 죽음뿐이 아니라

혹은 그의 실종(失踪)뿐이 아니라

그를 생각하는

그를 생각할 수 있는

너까지도 다 함께 숭배하고 마는 것이

숭배할 줄 아는 것이

나의 인내(忍耐)이니까

 

`누이야 장하고나!'

나는 쾌활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광대한 여름날의 착잡한 숲 속에

홀로 서서

나는 돌풍(突風)처럼 너한테 말할 수 있다

모든 산봉우리를 걸쳐온 돌풍(突風)처럼

당돌하고 시원하게

도회(都會)에서 달아나온 나는 말할 수 있다

`누이야 장하고나!'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시인 / 눈 -1-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김수영 시인 / 눈 -2-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廢墟)에 폐허(廢墟)에 눈이 내릴까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시인 / 눈 -3-

 

 

요 시인(詩人)

이제 저항시(抵抗詩)는

방해(妨害)로소이다

이제 영원히

저항시(抵抗詩)는

방해(妨害)로소이다

저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시오

저 산(山)허리를

돌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하늘을

묶는

허리띠모양으로

맴을 도는

눈송이를 보시오

 

요 시인(詩人)

용감(勇敢)한 시인(詩人)

―소용 없소이다

산(山)너머 민중(民衆)이라고

산(山)너머 민중(民衆)이라고

하여둡시다

민중(民衆)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웃음이 나오더라도

눈 내리는 날에는

손을 묶고 가만히

앉아계시오

서울서

의정부(議政府)로

뚫린

국도(國道)에

눈 내리는 날에는

`삑'차도

찌ㅍ차도

파발이 다 된

시골 빠스도

맥을 못 추고

맴을 도는 판이니

답답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요 시인(詩人)

가만히 계시오

민중(民衆)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요 시인(詩人)

용감(勇敢)한 착오(錯誤)야

그대의 저항(抵抗)은 무용(無用)

저항시(抵抗詩)는 더욱 무용(無用)

막대(莫大)한

방해(妨害)로소이다

까딱 마시오 손 하나 몸 하나

까딱 마시오

눈 오는 것만 지키고 계시오…….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金洙暎, 1921. 11. 27 ~ 1968. 6. 16] 시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하였으나 중퇴. 1946년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廟庭(묘정)의 노래>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으나, 1968년 6월 15일 밤 교통사고로 사망. 사후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 , 『사랑의 변주곡』(1988) 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등과 1981년 『김수영전집』 간행됨. 2001년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 추서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