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 / 망각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 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웬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 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달리는 행상(行喪)을 보랐고 있느니
내 가 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메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 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비운(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고만이라―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음을 아!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세기(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묘비명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비(碑)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 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비(碑)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恨) 되는 한마디 삭이실란가
조광, 1939. 12
김영랑 시인 / 물 보면 흐르고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은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듣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 흘러가건만
그 밤을 흘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우리는 바다 없이 살았지야 숨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꾸러져 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제주야 가고 오고 독목선(獨木船) 왜(倭)섬이사 갔다 왔지 허나 그게 바다러냐 건너 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삼 년 걸려도 큰 배를 짓자꾸나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 배 타고 떠나가자꾸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뚫으리라 큰 호통 하고 떠나가자꾸나 바다 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 벗은 넋이로다 풀어놓인 겨레로다 가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가별 머리엔 끄득 보배를 이고 오렴 발 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영랑시선, 정음사, 1949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시인 / 달나라의 장난 외 2편 (0) | 2019.11.01 |
---|---|
박세영 시인 / 탄식하는 여인 외 2편 (0) | 2019.11.01 |
김수영 시인 / 나의 가족(家族) 외 4편 (0) | 2019.10.31 |
박세영 시인 / 전원의 가을 외 2편 (0) | 2019.10.31 |
김영랑 시인 / 눈물 속 빛나는 보람 외 4편 (0) | 2019.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