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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영랑 시인 / 망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1.

김영랑 시인 / 망각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 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웬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 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달리는 행상(行喪)을 보랐고 있느니

 

내 가 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메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 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비운(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고만이라―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음을

아!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세기(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묘비명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비(碑)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 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비(碑)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恨) 되는 한마디 삭이실란가

 

조광, 1939. 12

 

 


 

 

김영랑 시인 / 물 보면 흐르고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은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듣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 흘러가건만

 

그 밤을 흘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우리는 바다 없이 살았지야 숨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꾸러져 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제주야 가고 오고

독목선(獨木船) 왜(倭)섬이사 갔다 왔지

허나 그게 바다러냐

건너 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삼 년 걸려도 큰 배를 짓자꾸나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 배 타고 떠나가자꾸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뚫으리라

큰 호통 하고 떠나가자꾸나

바다 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 벗은 넋이로다 풀어놓인 겨레로다

가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가별

머리엔 끄득 보배를 이고 오렴

발 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영랑시선, 정음사, 1949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