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연 시인 / 세상에 없는 빈방
뒤뜰 사이프러스 나무에는 빈방이 있다. 방에는 사막으로 통하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사막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웅크리고 목울대를 길게 빼고 마른 갈기를 세운다. 여자아이는 골목길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를 찾아 사막을 여행하는 꿈을 꾸고 있다. 사막 위로 흰 눈이 내린다. 오래 참아온 첫 울음이다. 사이프러스 나뭇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은 여자 아이만은 아니다. 몸집이 큰 사내아이가 여자아이를 얼러서 방으로 데려간다. 방 안에는 몸집이 큰 사내아이가 여럿이다. 여자아이는 다섯 살. 사내아이는 바지를 내리고 사타구니에 여자아이를 걸터앉힌다. 어두운 방 안에는 눈깔들이 색동 구슬처럼 낄낄거리며 굴러다닌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방은 어두운 방이다. 창호지 문을 통해 바깥의 선한 햇살이 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서까래에 붙어서 나를 내려다본 것도 같고 사막의 마른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더는 보이지 않는다. 여러 날을 앓아누웠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린다.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앉아 사막을 여행하는 낙타의 닳은 뒷굽처럼 뒤뚱거리며 기침을 한다. 목울대를 길게 빼고 목에 박힌 가시를 뱉는다. 뒤뜰 사이프러스 나무에는 빈방이 있다. 빈방에서 나는 사막처럼 마른기침을 한다. 나는 세상에 없는 빈방에 갇혔다. 몸은 알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7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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