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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은상 시인 / 기봉(起峰) 위에 서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9.

이은상 시인 / 기봉(起峰) 위에 서서

부제: 햇볕 아래 오르고 비 속에 돌아오다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아! 장(壯)할시고 비 몰려 오시는 경(景)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꿈 깬 뒤

 

 

임술년(壬戌年․1922) 5월 한양(漢陽)에서 병(病)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病院)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入院)한 지 삼주간(三週間)이 지난 6월 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 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상(床)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理)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노돌[鷺梁津]

 

 

차중(車中). 차(車)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아!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 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눈보라 치는 밤에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옥(獄)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 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 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李殷相) 시인 / 1903∼1982

시조 시인. 호는 노산(鷺山).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 사립 창신 학교 고등과를 나와 1923년에 연희 전문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하였다. 그 후 월간지 '신생'을 편집했고, 1931년에 이화 여전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호남 신문' 사장과 서울대,영남대 교수등을 지냈고, 1954년에는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 사업 회장, 민족 문화 협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시조 작가 협회장 및 숙명여대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에 노산 시조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1981년에 국정 자문 위원에 위촉되었다.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가고파]등으로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고, 1932년에 간행된 '노산 시조집'은 1920년대의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의 시조 부흥론에 의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는 '이충무공 일대기'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