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 시인 / 기봉(起峰) 위에 서서 부제: 햇볕 아래 오르고 비 속에 돌아오다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아! 장(壯)할시고 비 몰려 오시는 경(景)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꿈 깬 뒤
임술년(壬戌年․1922) 5월 한양(漢陽)에서 병(病)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病院)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入院)한 지 삼주간(三週間)이 지난 6월 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 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상(床)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理)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노돌[鷺梁津]
차중(車中). 차(車)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아!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 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눈보라 치는 밤에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옥(獄)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 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 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석정 시인 / 나랑 함께 외 4편 (0) | 2019.12.30 |
---|---|
신석정 시인 /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외 4편 (0) | 2019.12.29 |
이은상 시인 / 그대 대답하시오 외 3편 (0) | 2019.12.28 |
이호우 시인 / 청추(聽秋) 외 5편 (0) | 2019.12.28 |
이은상 시인 / 계월송(溪月頌) 외 4편 (0) | 2019.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