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나랑 함께
비낀 햇빛 아래 문득 바라보는 나무
나무 옆에 서보면 나무가 되고,
꽃 옆에 서보면 꽃이 되어도,
두루미 흘러가는 저 하늘을 이고 보면,
너희들의 가슴 언저리에 그 뜨거운 가슴 언저리에 있고 싶어라.
흐드러진 웃음, 그 웃음소리에도
꽃은 피고 마냥 꽃은 피어나고,
빛나는 너희 눈망울이야 그대로 한 개 별빛이거늘,
흘러간 지난날이사 돌아볼 겨를도 없다.
너희들 내다보는 앞날을 나랑 함께 걷게 하여라.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나무 등걸에 앉아서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나의 노래는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난초(蘭草)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입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날개가 돋쳤다면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뵈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 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석양에 능금같이 붉은 하늘을 날아서 똥그란 지구를 멀리 바라보며 옥토끼 기르는 목동이 되오리다 달나라에 가서…… 그리하여 푸른 달밤 피리소리 들려오거든 석양에 토끼 몰고 돌아가며 달나라에서 부는 나의 옥퉁소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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