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내 가슴 속에는 제삼장(第三章)
내 가슴 속에는 파르르 날아가는 나비가 있다. 나비의 그 가녀린 나랫소리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강물에 조약돌처럼 던져 버린 첫사랑이 있다.
내 가슴 속에는 하늘로 발돋움한 짙푸른 산이 있다. 산에 사는 나무와 나무에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산같이! 산같이!'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 가는 `내'가 있다.
산(山)의 서곡(序曲), 가림출판사, 1967
신석정 시인 / 눈맞춤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우 루 루 루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단장소곡(斷腸小曲)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대바람소리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대숲에 서서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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