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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내 가슴 속에는 제삼장(第三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31.

신석정 시인 / 내 가슴 속에는 제삼장(第三章)

 

 

내 가슴 속에는

파르르 날아가는 나비가 있다. 나비의 그 가녀린 나랫소리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강물에 조약돌처럼 던져 버린 첫사랑이 있다.

 

내 가슴 속에는

하늘로 발돋움한 짙푸른 산이 있다.

산에 사는 나무와 나무에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산같이! 산같이!'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 가는 `내'가 있다.

 

산(山)의 서곡(序曲), 가림출판사, 1967

 

 


 

 

신석정 시인 / 눈맞춤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단장소곡(斷腸小曲)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대바람소리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대숲에 서서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