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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은상 시인 /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

이은상 시인 /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삼태동(三台洞)은 고향(故鄕) 합포(合浦)에서 서(西)으로 칠십리(七十里)를 나가 있는 곳이다. 1925년 7월 2일 내 그 산촌(山村)을 지나다가 서숙(書塾)을 찾아 강선생(姜先生)이란 이와 인사하고 이 노래를 지어 드리고 가다.

 

삼태산(三台山) 깊은 골에 먼지 없는 이 마슬은

차움의 세상 밖에 따로 베푼 평화(平和)동산

내 길이 바쁘건마는 쉬다 갈까 하오

 

고목(古木)선 우물가에 물 긷는 저 아가씨

동이를 이기 전에 한 모금만 마셔 주오

타는 목 그 생명수(生命水)로 축여 볼까 하오

 

옷 벗은 아이들아 천사(天使)의 후신(後身)들아

풀 한 줌 흙 한 줌을 쥐고 옴은 무삼 일고

옳아 참 상처 난 내 몸에 그 약(藥) 발라 다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선죽교(善竹橋)

 

 

충신(忠臣)의 남긴 뜻이 돌에 스며 붉었으니

하마배(下馬拜) 하온 이들 몇 만(萬)인지 모르리만

돌아가 행(行)하신 이는 몇 분이나 되는고

 

충신(忠臣)의 타는 넋이 홍엽(紅葉)에 배어들어

용수(龍岫) 송악(松岳)에 두루 심겨 천만수(千萬樹)를

유객(遊客)이 헛보고 지나니 그를 설워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설야음(雪夜吟)

 

 

삼경(三更)이 넘어서야 거리를 벗어나서

눈빛에 길을 찾아 산(山) 마슬로 돌아오니

등잔불 그무는 저기 내 집인가 아닌가

 

눈보라 휘불리어 얼굴을 치는구나

찬 뺨에 흐르는 물 눈녹음만 아니오나

이 한밤 외진 산길에 어느 분이 알리오

 

지게에 다달아서 언 고리 잡다 말고

타는 애 끌 길 없어 되나서 산모루로

송림(松林)에 눈비 맞으며 돌아올 줄 몰라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모래 위를 거니노라

밀물을 피(避)하는 걸음 깨달으니 초제(草堤)로다

무심(無心)코 풀 위에 앉을 제 반디 놀라 날더라

 

청도암(淸濤岩) 밤 물결에 띄우노라 조각배를

시원한 바람 따라 흘리노라 백마도(白馬島)로

새벽만 넘는 달빛에 갈밭 돌아 오리라

 

빈 배에 몸을 맡겨 달 더불어 누웠거늘

어즐은 세상 일을 생각하여 무삼하리

밤고기 뛰는 소리에 그만인가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옛 강(江)물 찾아와

 

 

옛 강(江)물 그리워서 봄 따라 나왔더니

물도 그도 다 가시고 봄도 그 봄 아니온데

호을로 아니 간 것은 내 맘인가 하노라

 

물 건너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같이

뭉쳤단 바람 따라 헤어지고 마는 것을

지금도 고개 돌리니 곁에 선 듯하여라

 

그 옛날 이 모래 위에 서로 쓴 두 이름은

흐르는 물에 씻겨 길이 길이 같이 예리

몸이야 나뉘시온들 한(恨)할 줄이 있으랴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李殷相) 시인 / 1903∼1982

시조 시인. 호는 노산(鷺山).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 사립 창신 학교 고등과를 나와 1923년에 연희 전문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하였다. 그 후 월간지 '신생'을 편집했고, 1931년에 이화 여전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호남 신문' 사장과 서울대,영남대 교수등을 지냈고, 1954년에는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 사업 회장, 민족 문화 협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시조 작가 협회장 및 숙명여대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에 노산 시조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1981년에 국정 자문 위원에 위촉되었다.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가고파]등으로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고, 1932년에 간행된 '노산 시조집'은 1920년대의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의 시조 부흥론에 의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는 '이충무공 일대기'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