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대춘부(待春賦)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대화(對話)
―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 산수유(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경칩(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산(山) 같은 침묵(沈?)이 흐른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망향(望鄕)의 노래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年輪)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어린 손주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生活)'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바다에게 주는 시(詩)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발음(發音)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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