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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밤의 노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

신석정 시인 / 밤의 노래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그렇지만 설마 그래서야 될리라구!'

 

시궁창 같은 세월을 꽃도 머물어,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작은 핏줄에

핏줄 속에 수떨이는 가느다란 소리 있어,

아직은 뜨거운 가슴을 서로서로

꽃으로 문지르는가?

 

`아예 그대로 잦아들 순 없는 것이여!'

 

몸서리나는 어둔 밤을 비바람 미치게 몰려드는데,

번갯불 사이사이 천둥소리 들려오고,

머언 먼 천둥소리 산을 넘어 들려오고,

새벽을 잉태하는 뼈저린 신음소리,

우리 가슴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그대들의 귀에 젖은 노래소리 아닌가?'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밤이여 그것은 단조(單調)한...

원제 : 밤이여 그것은 단조(單調)한 비극(悲劇)이 아니다

 

 

해저와 같이 깊은

밤―

침실은 더욱 조용허이……

 

어두운 영창에는 별빛 어리고

아라사 원시림을 거쳐온 밤바람

침실에는 삼림의 그윽한 내음새가 돈다

 

성당처럼 조용한 침실에 앉아

깨어진 살림의 내일을 또 생각하노니

밤이여―

그것은 단조한 비극이 아니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비가(悲歌)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 시인 / 비의 서정시(抒情詩)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빙하(氷河)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