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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은상 시인 / 옛 동산에 올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

이은상 시인 /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詩人)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山)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風雨)엔지 사태(沙汰)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안두(案頭)에 놓인 책은 저대로 펴어 있고

나는 나대로 눈감고 앉았으니

이 사이 무한(無限)한 고요를 어느 뉘가 알리오

 

이윽고 눈을 떠서 깨달으니 황혼인데

아이는 내 그 동안 졸은 줄만 알았든지

대야에 물 떠놓으며 세수하소 하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옥류동(玉流洞)

 

 

옥석을 씻어 나려 옥류(玉流)가 되옵든가

옥류(玉流)로 닦아 내어 옥석(玉石)이 되옴인가

두 옥(玉)이 씻고 닦이니 어느 그ㅣㄴ 줄 몰라라

 

금강(金剛) 계상석(溪床石)이 다토아 희올 적에

백석담(白石潭) 저 바위야 참으로 희옵도다

희고서 아니 검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옥류(玉流)면 옥류(玉流)이오 옥석(玉石)이면 옥석(玉石)이지

구태어 이 동(洞)안에 향(香)내는 어디선고

앞선 이 한 곳을 가리키며 천화대(天華臺)라 하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松林)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섰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 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 시인 / 인생(人生)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山)도 나도 다가드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山)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나가니 인생(人生)인가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은상(李殷相) 시인 / 1903∼1982

시조 시인. 호는 노산(鷺山).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 사립 창신 학교 고등과를 나와 1923년에 연희 전문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하였다. 그 후 월간지 '신생'을 편집했고, 1931년에 이화 여전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호남 신문' 사장과 서울대,영남대 교수등을 지냈고, 1954년에는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 사업 회장, 민족 문화 협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시조 작가 협회장 및 숙명여대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에 노산 시조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1981년에 국정 자문 위원에 위촉되었다.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가고파]등으로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고, 1932년에 간행된 '노산 시조집'은 1920년대의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의 시조 부흥론에 의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는 '이충무공 일대기'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