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9.

신석정 시인 /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가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고운 심장(心臟)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고원(故園)에 보내는 시

 

 

그 가난한 뜨락에 네 어린놈들처럼 나날이 자라나는 나무와 푸성귀들이 철철이 그들의 죄없는 표정을 아끼지 않는 한, 우리는 욕되지 않는 가난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을 기다려도 좋다.

 

우리 `난(蘭)'이와 나이가 거의 맞서는 이천 년이 훨씬 넘었을 벽오동(碧梧桐)남기나 은행(銀杏)남기나 멀구슬남기들이 인젠 고개와 어깨를 서로 맞대고 어우러져 그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을 뾰조롬히 자랑하고, 시나대숲에서는 고 작은 비비새들이 새끼를 부르고 있고나.

 

후박남기와 라일락을 잘 가꾸어 머지 않은 뒷날에는 탐스러운 꽃들이 피어, 푸르고 연연한 향기를 좁은 뜨락에 가득 채우도록 하고, 뒤란에 심은 찔레꽃도 잘 보살펴서 울타리를 삼고, 석류남기와 대추남기도 올들어 꽃이 무척 피었으니, 가을엔 어린놈들의 군입정이 그리 모자라지는 않겠구나.

 

매실남기와 산수유남기 사이 빈자리에는 파초를 한 그루만 심어 두어 철따라 그 뜰을 지나가는 빗소리를 머물게 하고, 적적한 밤에는`당시(唐詩)'라도 읽으면서 조용히 그 빗소리를 듣도록 하렴.

가을에는 은행남기를 스무 남은 개 구해 보내리니 모두 제자리 잡아 심어라.

은행남기들이 가을에 그 황금같이 노오란 잎새들을 휘날리는 것은 다시없는 `멋'이니라.

 

인제 네 어린놈들이 장성한 뒤, 내가 너의 할아버지처럼 길솟는 지팽이에 의지하고, 그 좁은 뜨락을 거닐 때, `가난'이 욕되지 않는 세월 속에서 흐드러지게 웃어 볼 날을 이 남기들과 푸성귀 속에 마련해 두자.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 시인 /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산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간답디까?

구름도 고요한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헤매이는데……

어머니 석양에 내 홀로 강가에서

모래성 쌓고 놀 때

은행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듯이

안개 끼어 자욱한 강 건너 숲에서는

스며드는 달빛에 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 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 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꿈의 일부(一部)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몹시 날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백마는 길게 목놓아 울었다.

 

잠시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탄 백마는

무작정 달리고만 있었다.

 

동백꽃이 붉게 타는

어느 해안선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궁전의 원주(圓柱)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 뒤 나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메콩강(江) 언덕을 달릴 때였다.

문득 총소리에 내가 깬 것은……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

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