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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유자 시인 / 발코니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

김유자 시인 / 발코니

 

 

지붕을 타고내리는 빗방울을 지나 골목에 늘어붙은 그림자가 흘러가고 차 밑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끌며 발들이 지나가고 빈 의자 서너 개가 무릎을 맞대고 있는 정오

 

이층 창안에서 머리카락은 날리고 맨발이 걸어오고 빨래를 펼쳐 빨랫대에 너는 젖은 손이 오고 커피를 마시는 입술이 열렸다 닫히고 다시 열리는 하품이 오고 펼쳐져 있던 커튼의 페이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고 집이 여기저기 쑤시는 줄 모르고 머리에는 이 궁리 저 궁리가 오고 우체부는 일층 우편함에 이층 편지를 넣어두고 벨소리는 오지 않고

 

내려다보면 가만히 올려다보는 얼굴 점점 커지는 얼굴 속 두 눈에 흘러가는 구름 구름의 두 볼은 붉어오고 어둠이 슥슥 계단을 지우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이층은 떠오르고 뛰어내려도 이층은 죽지 않고 빨랫대에서 골목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팬티 한 장 언젠가 모든 것은 흙이 된다는데 흙이 된 몸속으로 뻗어오는 달의 뿌리들 물의 이파리들 출렁이는 세계에 태양은 슬그머니 불의 계단을 걸쳐놓고 당신 사주엔 흙이 없군, 마침내 멈춘 세계에서.

 

계간 『시작』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유자 시인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백하는 몸들』(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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