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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영처 시인 / 베를린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

서영처 시인 / 베를린

 

 

널 만나러 베를린에 간다

 

부품 상점의 기계 부속 이름 같은 베를린

동서를 가르듯 ㄹ과 ㄹ 사이를 분명하게 가르는 베를린

나사 같은 ㄹ을 두들겨 모음을 조립하면 베를린이 된다

더 단단해지는 ㄹ, 쇠 냄새가 난다

베를린에선 베토벤, 베버, 베베른, 베르크,  베틀 앞의 페넬로페까지

한꺼번에 열차에 실려 온다

베를린은 비를 맞는 도시

 

ㄹ은 몇 차례 꺾어드는 골목, 곳간의 걸쇠

아베체데 배를 최대한 데우고

식은 칼국수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술관으로 프리드리히 대제의 궁전으로 오페라하우스로 숲으로 노천카페로 은행으로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물리는 베를린

비가 그친다 바짓가랑이에서 ㄹ을 털어 낸다

이를테면 ㄹ이 거꾸로 걸리거나 먼 곳으로 달아나 나사 빠진 도시가 될 수도 있으련만

기차가 중앙역을 출발한다

자음의 함량이 풍부한 베를린의 철로 위로 나뒹구는 휴지와 페트병

레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뒷다리 너구리 아가리 알이 밴 우리 종아리

종일 베 짜는 소리로 베를린의 첫여름을 직조한다

 

계간 『포지션』 2019년 봄월호 발표

 

 


 

서영처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학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피아노 악어』(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사, 2015)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계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