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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미희 시인 / 어제의 약속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

조미희 시인 / 어제의 약속

 

 

  당신 새끼손가락에서 라일락이 필 때

  시간은 뒤로도 걸어요

 

  천변 근처 언덕으로 뛰어갔지요

  바람이 종아리 근처에서 회초리로 장난을 걸어요

  어디서 온 걸까요

  흔들리는 어금니 풍으로 깔깔거려요

 

  당신 눈 가장자리가

  아코디언처럼 접혔네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와요

  우리 키스할까요

  라일락 꽃 시발시발 흩날릴 때

  당신 몸이 주름에서

  가시로 충만할 때까지

 

  당신 새끼손가락에 라일락은 피지 않고

  시간은 앞으로 걷네요

 

  라일락꽃은 미리 피거나 미리 져서

  손톱 밑을 찌르는 사월

  그렁그렁 꽃잎 마르고

  당신이라는 작자는 늘 그년그년 도망쳤지요

 

  정신없이 찾은 라일락 아래서 나는

  퇴폐의 향기로 늙어가지요

 

계간 『포지션』 2019년  봄호 발표

 

 


 

 

조미희 시인 / 우리, 가깝고도 먼

 

 

세상에는 다양한 우리들의 규정이 있네

동그란 우리 네모난 우리 찌그러진 우리

오륜마크처럼 조금씩 발 담근 교집합의 우리

 

우리는 꽃밭처럼 향기롭고

폭탄처럼 무섭네

 

흩어져 있는 잡담과 과도한 뒷담화의

다발이 물웅덩이에서 썩어갈 때

우리는 깊이깊이 계면쩍은 사람

생몰 연도를 모르는 멸종동물처럼

기착지와 기착지로 떠도는 새 떼처럼

가깝고도 먼 우리들

 

꽃밭에 갔다가

우리라는 온갖 도형적 인간들을 만났네

두 손을 모으고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우리로의 진입을 넘보곤 했네

모든 전쟁은 우리끼리 하네

저쪽의 우리와 이쪽의 우리,

우리라는 말,

진영을 바꾸어가면서 얼마나 친절한 유대감인가

하지만, 가해와 박해 학살자까지도

우리라는 동그라미 속에 존재한다네

 

우리는 아름답고 추해서

우리를 무너트리고 또 건설하는 실수를 저지르네

나와 당신은 늘 가깝고도 먼 우리일 것이네

 

계간 『시인수첩』 2019년 여름호 발표

 

 


 

조미희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5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자칭씨의 오지 입문기』(시인수첩,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