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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희 시인 / 자라는 숲
신이 살아 있는 한 건축가 가우디는 죽지 않을 것이다
직선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곡선은 신의 영역이라는, 그의 탄식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이 인간을 가엽게 여겨 사랑으로 머리와 가슴을 손수 빚으셨다면, 인간 가우디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다리를 절뚝거리며 신의 저택을 지었으니
남은 사 분의 삼을 후생에서 이어 짓고 있는 기나긴 여정, 생전과 생후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인, 애 정신을 실천하는 거룩한 뜻을 따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수많은 손길의 헌신과 인연 앞에서 나는 다만 말문을 닫고 하염없이 경이로울 뿐이다
탄생 죽음 부활, 거대한 숲과 같은 성당 외부를 돌며 조각상으로 신의 역사를 읽고 새겨들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과 조화로움 앞에서 뜻 없이 저지른 하찮은 사악함은 외면 할 수도 있겠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죽어서도 실천 중이니 첨탑은 매일매일 새순을 밀어 올리는 영혼의 숲과도 같다 끝없이 뻗어있는 나뭇가지와 창으로 들이치는 빛의 세계에 흥건히 젖어, 이즈음에서 찬란하게 눈이 멀어도 좋겠다
신을 끔찍하게 사랑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에 영원히 세 들어 사는 선구자, 그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집 『이타적 언어』(포엠포엠, 2019) 중에서.
주석희 시인 / 순례, 술래
저기서 바위보다 키가 큰 풀은 없다 히말라야 눈 덮인 산맥이 날카롭고 눈부시다 장삼을 두른 수행자의 행렬이 붉은 균열로 뻗어간다 끝을 알 수 없는 균열은 두렵고도 아름답다 거친 호흡을 간신히 다스리며 발 앞에 이마를 내려놓는 낭떠러지 길,
초경이나 치렀을까 열세 살 소녀가 순례자의 길을 간다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영롱하여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까만 눈동자 척박한 내 심장쯤 금세 들켜버릴 것 같은 바람이 정강이를 걷어차고 악귀 울음을 울며 나뒹구는 오후
얼음 속 나날을 견디면 천리天理에 당도할 수 있나 천상으로 풀어지는 향 불 앞에서 부처 미소를 얻을 수 있나 어깨 위까지 쟁인 배낭을 걸머지고 힘겹게 넘어야 할 산은 어쩌면 내부에 있음이니 신의 거처를 찾아 인간의 마을을 기꺼이 떨치느니
멀고 먼, 詩 업은 나의 순례 길 손을 뻗으면 신기루처럼 어느새 저만큼 아른거리는 언어의 사원을 찾아 어둠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오늘도 술래,
시집 『이타적 언어』(포엠포엠, 2019) 중에서.
주석희 시인 / 웃는 절벽
저토록 지난한 날들이야, 새벽 물안개가 개밥바라기별로 다시 피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육체를 부려야 간신히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말 한필이 겨우 다닐 수 있는 낭떠러지 길 뒷걸음으로 밀리며 기어코 지켜낸 천년의 마을
고도의 겨울을 버틴 다랑논이 연초록을 껴입고 바람, 바람난 산들바람 캉캉 춤을 추고 있지
등에 커다란 대바구니 짐을 멘 아낙 전염병처럼 따라서 웃지 티끌만큼의 가식이 없는 태초의 얼굴이야
내가 사는 유리성은 한 사람의 손끝이 순식간에 만 명의 목숨을 가두기도 풀기도 하는 스피드게임에 빠져있어
깎아지른 빌딩 속에서 점, 점 희미해져 웃는 법을 잃어가는 내가 바로 벼랑이야 영혼이 가난한 오늘이 절벽이야
한 사람이 하나의 성문을 지키면 만 명의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천혜의 요새, 석두성(石斗城)
조금만 먹고, 조금만 근심하는 저곳이 내가 가야 할 지상낙원이야
계간 『포엠포엠』 2019년 여름호 발표
주석희 시인 / 카탈루냐광장
꿈 많은 유랑자의 도착지면서 출발지라 해도 되겠습니까. 물줄기가 나팔꽃처럼 피어나는 분수대와 쇄골을 마주 안고 거침이 없는 연인들의 속삭임, 둔탁한 바위에 독립의 결의를 다진 마시아의 추모탑이 비둘기들의 견고한 식탁으로 놓여 있습니다. 어젯밤 비둘기들의 파티는 즐거웠을까 바닥이 온통 흰 꽃잎으로 성찬입니다. 담장 밑에서 피고 지고 다시 피는 무궁화 꽃잎처럼 연인들의 키스는 지칠 줄 모르고. 수면에서 바닥에서 방언처럼 터지는 물방울 소리, 비둘기 빛 구름이 낮게 드리운 광장에 앉아 문명의 호수라 불리는 지중해 방향을 가늠해 봅니다. 지혜로운 수메르인이 머리가 검은 동방예의지국의 후예였다는 오랜 설도 곰곰 곱씹어봅니다. 도시의 커다란 눈동자 같은 오방색 광장, 이곳을 오랜 열망으로 찾아 나선 성문의 입구면서 나의 출구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계간 『포엠포엠』 2019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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