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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서봉 시인 / 각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0.

천서봉 시인 / 각성

 

 

어느 순간 그릇이 손을 이탈하여 깨어지는 일,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나는 비로소,

 

오늘까지 보던 것을 이제 오늘로 끝내는 일, 부레 없는 물고기가 되어,

 

돌아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나의 시작이자 끝이었다고,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릇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그런 온순한 일 따위는 아니고

 

가령 그것은 어둔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번개의 일, 손목이라도 그어,

 

불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비를 맞고 있다 어른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나는 여러 번 기도했었고 그런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오늘, 나는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어쨌든 비는 구름의 각성

 

월간 『시인동네』 2019년 3월호 발표

 

 


 

 

천서봉 시인 / 슬픈 수비학

 

 

‘이퀄’이라는 기호에 대하여 생각하는 저녁이다

기호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이 같아지는 일,

저울이 정지하듯 나와 당신이 하나가 되는 일,

그런 일도 일종의 평등인 것일까

 

문제를 풀며 함께 수학하던 친구는

문제를 풀고 또 문제를 풀다가 어느 순간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는 사라지고

문제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남아…

아뿔싸,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사실조차 잊어버렸구나

이런 오늘을 우리는 평화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카페 ‘마스’에서 나는 ‘비너스’같은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나는 죽기 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도하는 나를 숫자로 쓴다면 그건 6에 가깝지 않나

생각할 때, 등수에 익숙한 사람들은 차례차례 줄을 서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고 저마다의 저녁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작은 슬픔을 나는 행복이라고 적어둬야겠다

 

내가 기호가 되고 기호에 감추어진 비의를 당신이 찾아낼 때까지

數祕적으로, 아니 조금만 더 守備적인 삶을 살기로 한다

 

계간 『시산맥』 2019년 가을호 발표

 

 


 

 

천서봉 시인 / 적막

 

 

슬픔에는 네 손바닥만 한 슬픔을 뺀 슬픔과 내 그림자만큼을 더한 슬픔이 있고 그 슬픔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오늘도 터미널에는 편지지 같은 버스들이 오간다 함께 태워 보내지 못한 울렁임은 여기 남아 고요에 더해지는 걸까 고요를 빼는 걸까 슬픔을 슬픔으로 견뎌내는 너의 가슴은 단단해지는 걸까 아니면 녹는 걸까 생각한다 흘러내리는 놀 아래로 제법 길어지는 저녁의 가지들, 너머로 사탕을 손에 쥔 아이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탈길 달려갈 때 사탕은 어떤 하나의 대의를 감당하는 것일까 고요와 구분되지 않는 이 소란을 적막이라 부르면 일용하던 단어들 대신 검은 구름이 우리의 혀 위에서 한 번 더 녹아내린다

 

계간 『주변인과 문학』 2018년 겨울호 발표

 

 


 

천서봉(千瑞鳳)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2005년《작가세계》 신인상에 〈그리운 습격〉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서봉氏의 가방』(문학동네, 2011)와 포토에세이 『있는 힘껏, 당신』(호미, 201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