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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유리 시인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1.

조유리 시인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이 캔버스의 꽃들은 다 위작이다, 빨강과 초록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처럼 주석이 필요한 색깔에 이르러 춘절은 끝장났다 내용 없이 시절에 정(情)을 팔았던 것은 아니지만 나를 열어본 무덤마다 좀 더 그럴듯한 비문을 원했다 리코더를 잘 부는 추억과 저녁마다 차를 마시는 건 어떠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마흔아홉 개의 구멍마다 바람 빼는 형식으로 각을 떴다

 

오냐, 이 생(生)에서 다시는 상한 비색을 달래지 않겠다 실패한 화장을 양 볼에 바르고 계절마다 가면무도회를 열겠다 그러니까 실뱀 같은 각주 우글거릴 때까지 삽을 들고 나를 읽었다 하지 말라

 

함부로 내 고독을 삽질하지 말라

 

*천경자 화백의 자서전 명과 동일

 

문학무크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호 발표

 

 


 

 

조유리 시인 / 칼로의 초상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 칼로*-”

 

 

심혈관이 파열된 거울처럼 분명하고 거울 속에 묶어놓은 침대처럼 안전한

 

몸이 거절한 나는, 달의 태반으로부터 혁명을 수혈 받은 나는, 붉은 흙으로 빚은 자궁을 캔버스에 눕혀 날마다 화관을 씌워주는 나는, 절름거리는 이젤에서 오른 다리가 왼 다리를 태질 하는 동안 온 몸에 화살이 박힌 나는, 느닷없이 척추에 뛰어 들어 철골심으로 박힌 절망이었던 나는, 강철 코르셋을 펄럭이며 적색당원을 선서한 나는

 

운명의 마지막 장에 피칠을 해서라도 낳고 싶은 내가 있어 150년 전 추방된 아랫도리를 밤마다 배란하는

 

가윗날에 잘려나간 태胎의 망명지인 나는,

 

*프리다 칼로(1907-1954) - 디에고 리베라와 파란의 사랑을 했던 멕시코의 페미니즘 화가

 

문학무크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호 발표

 

 


 

조유리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상반기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흰 그늘 속 검은 잠』(시산맥, 2018)이 있음. 15회 시산맥상을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