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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나영 시인 / 충만한 착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0.

김나영 시인 / 충만한 착시

 

 

저기 뒷모습이 걸어간다. 내가 수천 번 눈에 담았던 뒷모습이다. 눈에 욱여넣고 또 욱여넣고 카메라에 다시 담는 뒷모습이다. 어느 방향에서 들이대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뒷모습이다. 카메라는 다만 내 마음의 흘러넘침을 조금 거들 뿐, 하루에 한 번씩 나를 베란다에 우두망찰 세워두는 뒷모습이다.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갔으면 싶은 뒷모습이다. <LG 25시> 모서리를 돌아설 때 그때서야 그물 같은 내 시선을 거둬들이는 뒷모습이다. 16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중 가장 오래 본 모습이다. 봐도봐도 물리지 않는, 왜곡된 내 시선의 항상성을 껴입고 가는 뒷모습이다. 뒷모습이지만 뒷모습도 아닌 모습이다. 걸어가는 것 같지만 다시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은 뒷모습이다. 머리에 햇빛 세례를 듬뿍 받으며, 좌우에 도열한 나뭇잎 갈채를 받으며 저기 내 아이들이 아귀 같은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간다.

 

계간 『애지』 2018년 겨울호 발표

 

 


 

 

김나영 시인 / 추천(鞦韆)

 

 

그네를 보니 올라타고 싶다. 그네를 보니 흔들리고 싶다. 오후 다섯 시 남아도는 셀로판지 같은 햇살들아, 오후 다섯 시 십 분 퇴근을 서두르는 햇살들아, 오후 다섯 시 이십 분 아보카도 오일 같은 햇살들아, 미끌미끌 나를 밀어다오. 내 발이 스폰지 케잌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나를 밀어다오. 아니아니 등때기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나를 힘차게 밀어다오. 이 땅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든 것들아, 내가 질식할 지경이니 부드러운 곡선이 넘실대는 저 허공으로 내 발을 담그게 해다오. 봄이 오는 방향으로 나를 탱크처럼 밀어 부쳐다오. 내 머리에서 푸른 피가 분수처럼 피어나게 박차를 가해다오. 내 안의 흔들림이 깨어날 때까지 나를 휘휘 저어다오. 여기 말고 저기로, 동이 서에서 멀듯이 남이 북에서 멀듯이 나를 멀리 밀어다오. 이 봄의 고삐를 놓치지 않게 분홍이 번지는 저 너머로 나를 밀어다오.

 

계간 『포엠포엠』 2018년 가을호 발표

 

 


 

김나영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8년 《예술세계》로 등단.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저서로는 시집으로『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2006)와 『수작』(애지, 2010), 에세이 『홍난파 수필선집』(2017, 지식을만드는지식)이 있음. 현재 『다층』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