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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율 시인 / 이상한 기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0.

김지율 시인 / 이상한 기후

 

 

  수면내시경 하는 날

   의사는 뻔뻔한 수수께끼를 냈어

  세상에 하나 있고 너에게 없지만

  당신에게 두 개 있는 것이 무얼까요

  나는 툰드라라고 했어

 

  꿈은 도대체 몇 개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이불을 덮지 않은 날은 꿈도 시려

  당신은 내 커트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했지

  툰드라에 가면 머리를 자르고 멋지게 콧수염을 기르고 싶어

  너의 그 많은 오늘 밤은 어디로 간 거니

  빙하기의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유산시킨 밤

  나는 벽을 보고 누워

  툰드라의 기원 따윈 절대 생각하지 않았어

 

  p35 이 지겨운 사진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p79 펭귄들이 전하는 뉴스들은 너무 지루해

  p103 당신의 툰드라로 달려가고 있어

  p153 부탁이야 나에게는 농담만 해줄래

 

  백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지만

  딸꾹질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툰드라의 사생활 따윈 관심 없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빙하는 줄줄 녹아내리잖아

  그러게 이제 그 뻔한 수수께끼도 집어 치워

 

 


 

 

김지율 시인 / 식욕을 위한 피어싱

 

 

  붉은 입술들이

  공중에 떠다니지

  설탕을 먹으며 둥둥 구름이 되지

  죽기 전에 탐스런 너를 먹어치워야 하고

  나는 나의 재물이 되어야 하지

  내 몸에서 자라는 토마토들은

  너를 완벽하게 뚫을 수 있는 맛이야

  마르고 깔깔한 맛

  조각난 허리, 조각난 머리통

  아직 녹지 않은 빨간 눈알까지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먹어 치우고 있지

  지루한 맛은 딱 질색이야

  케첩같이 터트리고 싶은 맛

  절대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는 맛이 좋아

  부숴진 야채 크래커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당근 주스에게 미안해라고 했어

  집을 떠나면 항상 배가 고파

  벨트 구멍들은 점점 조여오고

  두 번째 구멍은 너무 답답하지

  주방은 너무 깜깜하지

 

 


 

 

김지율 시인 / 할머니라는 생선

 

 

   그 옛날 할머니라는 생선이 있었다 지금도 살아 박스만한 얼음덩이 위에 누워 있다 뻐끔뻐끔 담배 피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할머니 지금은 목요일 저녁이고 내일 아침은 맑을 거야 이젠 나쁜 짓 안 해 할머니 맘 놓고 얼음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얼어버려 할머니 유효기간이 지난 생선은 반값이야 하얀 트레이 위에 배를 깔고 누운 할머니 랩으로 싱싱하게 포장을 해도 냄새가 나, 썩은 조기 냄새가 나던 할머니 생선이라면 끔벅 죽던 할머니 아들 셋을 먼저 보내고 청승맞게 말 많던 할머니 짭쪼롬하게 간을 해서 노릇노릇 구워 먹을까 비늘을 살살 벗기고 지느러미를 치고 내장까지 꺼내 소금을 뿌려 젓갈을 담글까 내 피의 반인 할머니 모질고 독한 할머니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나도 피가 거꾸로 돌아 할머니 그래 이년아 나도 그러고 싶었겠냐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겠냐, 세일 중인 조기 한 두름 뒤집혀 꼬꾸라진 할머니 오늘 저녁 우리 집엔 냄새가 날 거야 분명히 수상한 비린내가 날 거야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단시

 

 


 

김지율 시인

1973년 진주에서 출생, 2009년 《시사사》로 등단,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8년 『내 이름은 구운몽』으로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경상대학교 박사수료하고 同 대학에서 강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