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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희 시인 / 잉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0.

박남희 시인 / 잉크

 

 

잉크는 강이다 이따금씩 아름다운 산이나 들판을 끼고 휘어져 흐르거나 거대한 모래산을 만나 미세하게 갈라져 흐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의 세목에 집착하지 않는다 잉크의 심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물고기들과 돌들과 수초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잉크는 가끔씩 그것들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른다

 

잉크는 건너야 할 강이다 배를 타고 건너거나 수영을 하거나 다리를 놓아 건너는 방식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잉크는 눈 깜짝 할 사이에도 건널 수 있지만 평생을 걸려도 건널 수 없는 난해한 강이다 잉크는 날개로도 건널 수 있고 빛으로도 건널 수 있다 물론 어둠으로도 건널 수 있다 그런데 건널 수 있고 없고는 주체의 찰나가 결정한다

 

내가 너를 함부로 건널 수 없고 네가 나를 함부로 건널 수 없듯이 잉크도 그렇다 잉크를 건널 수 있는 방식은 관계이다 새의 날개가 좌우 양쪽에 있는 것은 관계 때문이다 빛과 어둠도 수많은 것들과 관계되어 있다 관계가 부력을 낳고 속도를 결정한다 그것이 명확한 것인지 은밀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빛과 어둠의 몫이다

 

잉크는 건너지 않아도 되는 강이다 그냥 신비한 관계 속에 들어 출렁이면 족한 강이다 그래서 잉크는 마르지 않는 강이다

 

 계간 『서정시학』2019년 가을호 발표

 

 


 

 

박남희 시인 / 저녁의 맛

 

 

  노을 속에서 저녁을 더듬어 찾았다 저녁이 없었다 그 대신 어둑한 고양이 같은 걱정이 웅크리고 있었다 걱정이 저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면 어둠이 뻑뻑한데 왠지 노을은 달콤했다 신기한 저녁의 맛이라고 했다 노을이 어둠에 쏟아놓은 것들이 이렇게 달콤한 맛을 내는 줄은 몰랐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노을 냄새를 아는 고양이라고 했다 노을 주변에는 어둠이 엷어져 있었다 고양이의 짓이라고 했다 어둠을 훔쳐 먹는 일이 노을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고양이는 아는지 냄새는 밤마다 분주했다

 

  노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저녁의 맛을 누설하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동안 아무도 저녁의 맛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므로 노을 근처에서 저물 줄만 알았다 저물면서 그림자가 길어질 때면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노을 속에서 쥐 대신 저녁을 뒤적이고 있었다 저녁은 쥐처럼 숨을 구멍이 없다 구멍이 누설한 비밀의 맛, 고양이의 탈을 쓴 걱정은 그 맛을 너무 잘 안다

 

 계간 『시산맥』2019년 가을호 발표

 

 


 

박남희 시인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한국문연, 1999),『이불 속의 쥐』(문학과경계, 2005) 등과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