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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숙자 시인 / 사라진 말들의 유해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9.

정숙자 시인 / 사라진 말들의 유해

 

 

  현장을 떠난 말들이 붓두껍 속에 고이는 걸까

 

  침묵을 건넌 말들이 거기 머물러 씨앗이 된다는 걸까

 

  어디선가 다친 말

  묻어버린 말

  쓰러진 말

  바람 소리 날려보지도 못한

  하늘, 곳곳에 뿌려진 타인의 말도 때로는 익명의 필묵에 맺혀

  가만가만 익어간다는 것일까

 

  살얼음을 끼고 창가에 당도한 아침

  입 속에서, 어깨뼈에서 덜컹덜컹 흔들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의 생존의 빙벽

 

  어떤 회로를 타고 창궐했는지

 

  구밀복검(口蜜腹劍), 참으로 당돌한 팔매질이다

 

  말을 떠나서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자다’

  이런 말이 공공연한 주술이 된 지도 오래!

 

  말없이도 말이 되던 말다운 말

  어떤 말에도 파묻히지 아니하던 실다운 말

 

  그리운, 그리 운 말들 사라지는데 슬픈 문장이 멀리서 온다

 

계간 『들소리문학』 2017년 봄호 발표

 

 


 

정숙자 시인

195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뿌리 깊은 달』 등과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