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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란 시인 / 검정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2.

박소란 시인 / 검정

 

 

  검정은 있다

 

  세수를 하고 수건을 집어 들 때나 젖은 손으로

  쌀을 씻을 때 갓 지은 밥을 풀 때

  검정을 본다

 

  수시로 고개를 드는 검정

  방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다가가면 깜짝 놀래는 검정

 

  너는 대체 누구니?

  늦은 시각 들른 어느 상가(喪家)에서 묻어온 것인지

  제 몸만 한 개미를 지고 가던 개미인지 장지(葬地)의 흙인지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이내 도망쳐 버리는 검정

  뜻 모를 이름의 벌레처럼 수많은 발을 달고서

 

  나는 공연히 이불 밑이나 호주머니 속을 들춰 보게 되고

  비명을 지르게 되고

 

  검정은 없지만, 분명

  검정은 있다

 

  밤이면 쓰다 만 일기 속에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인다

  너는 대체 누구니?

 

  버려야겠다 이 어두운 방을,

  생각하지만

  문을 열면 이내 성큼 따라나서는 검정

 

  검정은 나를 입고 아주 잠시 외출한다

 

월간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 발표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이 있음. 2015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