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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滴―존재의 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3.

김신용 시인 / 滴―존재의 집

 

 

   풀잎에

   작은 염낭거미의 집이 붙어 있다

   물방울이 풀잎에 맺혔다가 그대로 화석이 된 것 같은

   낡은 빛깔로, 이제는 허물어지고 있는 집

   가만히 손가락 끝으로 헤쳐 보니, 마치 고독사의 뼈 같은

   작은 염낭거미의 껍질이 놓여 있다

   자신의 무게라고는 한 점도 없는, 후 불면 먼지처럼 지워질

   얇디얇은 껍질―, 한때 이 지상에서 살았던

   흔적처럼 놓여 있다. 태어나, 집도 짓지 않고

   마치 생을 배회하듯 살았던, 이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체가

   일생에 단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었던

   그 집―.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므로

   이 지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행복한 거처였던 집이, 이제는 낡아

   폐가처럼 허물어지고 있으면서도, 풀잎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완강히 놓여 있다. 아직도 떠나보내지 못한 새끼가 있는 듯

   아직도 새끼들에게 먹일, 자신의 체액이 남아 있다는 듯

   자신의 손톱으로 자신의 몸에 새겨 넣은 무늬이듯

   일생에 단 한번, 자신의 몸에서 뽑아 낸 거미줄로

   몇 겹씩, 튼튼한 고치처럼 지은

   그 밀폐의

   집이―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여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滴-대추씨에 관한 小考

 

 

  마당에 서 있는 대추나무 한 그루, 가을이면 인심 좋은 후덕한 마음씨처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과육이 달고 빛깔도 고와 이웃집 강아지까지 찾아 와 땅에 떨어진 대추를 물어가곤 한다. 그렇게 대추가 떨어진 자리, 미처 줍지 못해 흙에 묻힌 대추씨들이 이듬 해 봄이면 어김없이 싹을 틔워 올린다. 부드러운 풀잎처럼 생긴, 연초록의 어린싹들-. 그러나 자라 오르면서 연하고 부드러운 어린싹에는 푸르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그 줄기가 긁어지면서 가시는 누구의 손끝도 닿지 못하게 더욱 날카로워져, 마치 그 무엇의 손길도 거부하며 웅크린 야생의 발톱처럼 느껴진다.

 

  대체 저 후덕하고 마음씨 넉넉한 품을 가진 대추나무에서

  어떻게 이런 異種의 씨가 맺혀지는 것일까

 

  DNA를 뗐다 붙였다 하는 유전자 편집으로도 어쩌지 못할 것 같은, 저 자기에게로의

  회귀-.

 

  성형수술 된-, 접골 된-, 혹은 이종교배 된-. 나무에서

  한사코 母川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끈질긴 본능

 

  대추씨는 야물다. 쬐그만 것이 이빨로 깨물어도 자국도 안 남는다.

  대체 저 단단한 것 속에는 어떤 고집이, 어떤 집요함이 들어 있기에,

  자신의 유전자 형질 변경을 그토록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예측 가능하게 예측 불가능한-, 씨에서 보는

 

  저 떨어짐의 무거운 질량!

 

계간 『포엠포엠』 2016년 가을호 발표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1988), 『개 같은 날들의 기록』(1990), 『몽유 속을 걷다』(1998),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 (2007),  『바자울에 기대다』(2011), 『잉어』(2013) 등과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 1,2』『기계 앵무새』 (1997), ‘『달은 어디에 있나 1. 2』 <고백을 이 제목으로 재출간> (2003), 『새를 아세요?』(2014)  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시인광장문학상과 같은 해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