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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우 시인 /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30.

김선우 시인 /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보라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을 조금 찢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염소의 몸 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나오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망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내 고향은 검은 염소의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과 혼열이어서 나는 손톱니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손으로 무른 밥을 먹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새 나를잊었지만, 괜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거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에세이>

김선우 시인 / 달의 기원

 

 

도시가 타락하는 것은 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어찌하여 달은 지구 가까이에서, 저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로 지구를 바라보게 된 것일까요. 달의 기원을 몽상하는 일은 세속의 일상을 가로질러 나에게 우주먼지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고 우주거품이라든지, 은하, 블랙홀이라는 발들을 떠오르게 하지요. 그리고 묻게 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라고.

 

달은 우리 은하가 만들어질 때 어떤 연유로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 이 별의 일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와 한 몸이었던 달. 그래서 달은 멀릭 가지 못하고 허락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구를 그리워하며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그리움, 그 안타까운 일렁임이 저토록 교교한 빛의 너울로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밤마다 그 물살 속에 달빛의 아이들을 산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달이 가장 부푸는 만월에 일어나는 월식은, 지구와 한 몸이었던 달이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고자 염원하는 신성한 혼례인지도 모릅니다. 지구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달. 그 혼례의 밤이 지구의 그림자 속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금 비켜가야 하는 슬픈 숙명을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혹은, 우주를 유랑하는 떠돌이별이었던 달이 우연히 지구 옆을 지나가다가 한송이 푸른 꽃인 지구에 매혹되어 영영 지구 곁을 서성거리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서성거림. 우주를 떠돌며 그가 알게 된 다른 모든 은하의 별들이 푸른 별이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날마다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면서, 단지 서성가리면서······ 혹은, 우연히 지나쳐 흐르던 달의 노래를 사모하여 지구가 달을 보내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달은 또다른 미지의 먼 은하를 꿈꾸고 지구는 창백하게 떨리는 달의 속눈썹을 단 한번 쓰다듬어줄 수 있기를 꿈꾸고······ 그렇게 두 별의 아득히 비껴선 그리움 때문에 달빛이 저토록 몽롱한 슬픔의 빛을 띠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달이 뜨지 않는 지구의 밤이 그토록 적막한 것인지도.

 

어쨌거나 달은, 나라는 존재가 지구별 위의 미미하기 짝이 없는 어떤 공간에 부려져 ‘삶’이라는 이름의 어떤 호흡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환영입니다. ‘우주’라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심연 속의 나의 목숨이란 우주의 목숨에 비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나를 받아안고 있는 지구의 목숨 또한 우주의 목숨에 비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수백억을 헤아리는 은하들 중 자그마하고 평범한 한 은하에 불과한 태양계 속의 작은 별 지구와 달. 바로 이곳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우리의 삶이 얻고자 하는 세속의 것들이 부디 깨끗한 욕망으로 빚어지는 맑은 물 한사발을 얻을 수 있기를.

 

말갛고 슬픈 빛으로 조용히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천공의 눈.

 

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세속이 무한한 연민으로 일렁거리게 됩니다. 현란한 도시의 불빛들이 내달려간 욕망의 피뢰침 끝에서 외줄을 타는 슬픈 광대들, 나와 우리가 어디를 향해 삶의 물꼬를 터야 할 것인지를 되묻게 됩니다. 달은 인간을 향해 쉬이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그리하여 달이 뜨지 않는 죽음의 시간을 지나 다시 부활하곤 하는 달은, 자신의 숨결에 성심을 다하며 지구별 위의 인간 역시 가장 낮고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사랑할 것을, 이 별을 사랑할 것을 묵언의 기도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의 죽음과 부활, 우리가 일상적인 것이라 느끼는 달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은 달의 의지가 이룬 매일의 기적이라는 것을, 내게 주어진 하루분의 생이 죽음을 껴안고 흘러가는 시계추 위에서 아직은 살 쪽으로 기울어 잇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라는 것을.

 

달빛에 공명하는 시간을 잃어버리면서 인간의 도시는 타락해 갑니다. 우주에의 노스탤지어를 잃어버리면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교활해집니다. 달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신성한 원시(原始)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꿈은 무지해집니다. 저 달에서 보면 지구 역시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고 있겠지요. 매일매일의 기적의 힘으로.

 

 


 

김선우(金宣佑)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른이 읽는 동화 『바리공주』.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