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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호일 시인 / 낙천주의자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6.

최호일 시인 / 낙천주의자

 

 

그는 그림자를 샀다 비싼 것으로, 색깔이 환한 것으로

 

밥을 먹거나 심지어 운동을 할 때도 데리고 다녔다 그는 특이한 거미를 수백 마리 키우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게 취미였다

그러나 잘 죽어지지 않았다

 

팔을 자르고 몸의 안쪽을 뜯어 내 조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로 제목을 달았다 그런 복잡하고 불편한 자세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엎드려 책을 볼 때는 혹시 잠든 뱀이 아니었을까

뱀의 배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얼굴이 없었으므로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다녔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그를 원망하며 멀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도박에 빠지고 취미가 바뀌어 머리가 두 개거나 귀가 어두운 원숭이를 수집하고 시집을 읽으며 지식인이 되기 시작했다

 

점점 그가 되어 갔다

원숭이가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보리밥에 상추를 싸 먹으며

어느 날 커다란 망치로 그를 때려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낙천주의자가 되었다

죽는 것을 잊어버리고

 

웹진 『시인광장』 2016년 7월호 발표

 

 


 

최호일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200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나나의 웃음』(문예중앙, 2014)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