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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인한 시인 /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6.

강인한 시인 /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나는 행복했지.

포켓에 가득가득 채울 만큼의

딱지도 보물도 없으면서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네.

 

서랍이 많이 달린 책상을

내 것으로 물려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지.

감춰야 할 비밀도 애인도

별로 없으면서

그때 나는 스물 일곱 살이었네.

 

그리고 다시 십년도 지나

방이 많은 집을 한 채

우리집으로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행복했지.

그 첫번째의 집들이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

태극기를 대문에 달고 싶을 만큼

철없이 행복했지

그때 나는 쓸쓸히 중년을 넘고 있었네.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 데사파레시도스*

 

 

  어머니 새벽 안개에 옷깃을 적시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의 광장에 와서 울고 있는 어머니

  인제는 그만 우셔요

  흰 꽃들의 아침을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 우리들의 이름을랑 그만 부르셔요

  사람은 한 번 죽는 것

  비겁한 자는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이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고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

  추악한 전쟁에 휘말려

  다이너마이트로 산산조각 난 우리들의 꿈

  온몸에 총알을 맞고

  구멍 투성이로 쓰러진 우리들의 사랑

  짓밟히고 짓이겨져도 우리들의

  더운 피는 마냥 붉게 타올라

  조국은 아름다왔습니다

  아, 첫번째 모음의 나라 아르헨티나

  마취된 채로 발가벗겨지고

  한꺼번에 몇 명씩 묶여 조국의 하늘 높이 떠서

  대서양 깊은 바닷속으로 내던져진 생죽음

  다시는 부르지 마셔요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온 우리들의 이름을

  더 이상 눈물로 부르지 마셔요

  비둘기는 오전의 정부 청사 지붕에 올라

  햇살 속에 드러난 맨발이 뜨거워서

  보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웁니다

  우는 것이 어찌 비둘기뿐일까요

  날지 못하는 우리들의 말

  팔을 잘리고 다리를 잘린 우리들의 말도

  입술을 잃고 허공에서 떠돌아

  안개 속으로 밤의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날며 웁니다

  울긋불긋 저들의 가슴마다 빛나는 무공 훈장

  모진 독재의 군화에 채여

  아기를 몸에 지닌 당신의 젊은 딸이 능욕을 당하고

  건초처럼 시든 엉겅퀴처럼

  스러지기도 했지요 어머니

  울지 마셔요

  한꺼번에 파헤쳐진 공동묘지

  비록 우리가 뼈와 슬픔으로 밖에 어머니를

  대하지 못한다 하여도

  아르헨티나는 우리들의 조국인 것을

  용서해 주셔요

  오늘의 역사는 어제의 것에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고

  역사는, 오늘의 역사는

  처음부터 새로이 쓰여지는 것이라고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

  갇힌 지하실에서 껴안은 불길도, 불길 속의 죽음도

  두렵지 않았어요

  역사를 위하여……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성이 가리키는 올바름을 위하여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끝내는 지켜져야 할 인간의 순결한 자유를 위하여

  단지 그뿐이었지요

  겨울에 오히려 더운 피가 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의 광장에 와서 울고 있는 어머니

  산비둘기 빨갛게 울고 있는 맨발

  우리들의 어머니

  인제는 그만 우셔요

  전나무 빽빽한 안데스의 이마를 스쳐가는

  저녁 햇살이 곱고

  어린 양치기들의 휘파람 소리 들려오거든

  아르헨티나를 온몸으로 사랑하였던

  불길 뜨거운 당신의 아들 딸들을

  기억해 주셔요

  부르면 목이 메는 조국의 이름과 함께

  기억해 주셔요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 어머니.

 

* 1976년부터 4년간은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의 살인 부대가 수천 명의 정치범을 잡아 학살했던 시기다. 민정이 들어선 이후 1984년 1월에 그 당시 실종된 희생자들의 시체 6백여 구가 암매장 되었던 곳이 발견되기도 했다. 데사파레시도스는 실종자들이라는 뜻. 그 무렵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정부 청사 앞 오월의 광장에서는 실종자들의 어머니들이 통곡을 하며 자식들의 생사라도 알려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었다.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이상기후』(1966), 『불꽃』(1974), 『전라도 시인』(1982), 『우리나라 날씨』(1986), 『칼레의 시민들』(1992), 『황홀한 물살』(1999), 『푸른 심연』(2005), 『입술』(2009) 등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 그리고 시비평집『시를 찾는 그대에게』(200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