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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강물 1
한 이레 하늘과 땅 갤 줄을 모르고 새와 벌레 서러워 울음 멈추리라 생각했다, 그이 가면 가게들 첩첩으로 문 닫아 걸고 나무에 저자에 인적 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그 화려한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계집들 눈웃음으로 사내들을 홀리고 사내들 구전 찾기에 눈에 핏발이 섰다.
대장간에서 어물전에서 난장판에서 계집 사내 어우러져 시새우고 다투고 가다간 어깨 너머로 눈 맞추는구나, 그 큰 뜻 그 바람 시들었는데도.
한밤에 깨어 강물소리를 듣는다.
사람 사는 일이란 무릇 이러한 건가, 빗소리 천둥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고 꽃샘 잎샘에 잠시 몸 움츠릴 뿐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같은 건가.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개치 나루에서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다 그 해 봄에 꽃가루가 날리고 꽃바람 타고 역병이 찾아와 마을과 나루가 죽음으로 덮이던 고장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 내 외로운 친구 숨죽여 떠돌다가 저 느티나무 아래 몰매로 묻힌 고장이다
바람아 다 잊었구나 늙은 나무에 굵은 살구꽃이 달려도 봄이 와서 내 친구 꽃에 붙어 울어도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지만 죽음 위에 꽃가루 날리던 나루이지만 원통하게 내 친구 묻힌 고장이지만
모두 다 잊어버린 장바닥을 돌다 한산한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읍내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꺼나. 술에라도 취해 볼꺼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꺼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꺼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꺼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꺼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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