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신달자 시인 / 폭풍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신달자 시인 / 폭풍

 

 

회오리 회오리 바람에

수만 번 돌다가

쓰러지고 싶다

 

쓰러져서 완전히

박살나고 싶다

 

한점 가루도 남김 없이

폭풍에 아스라히

날려가서

 

이승의 끝에 가서

끝에 가서

아 흔적도 없이……

 

다만 하나의 빛깔로, 문학사상사, 1987

 

 


 

 

신달자 시인 / 표정(表情)

 

 

성냥을 산다.

함봉(緘封)된 성냥곽에서

한개비 성냥을 집어 낸다.

그것을 그어댄다.

불이 붙으며

내 손가락 끝이 타기 시작한다.

함봉(緘封)된 성냥곽에서

끌어내온 또하나의 자신(自身)이

조금씩 재가 되고 있다.

무심히 버려져 있는

타다 버려진 성냥개비

다시는 인화(引火)될 수 없는

버려진 것의 숙명(宿命)

지금 이상하게도

한개비 성냥에 마음이 쏠리고 있다.

 

봉헌문자, 현대문학사, 1973

 

 


 

 

신달자 시인 / 해당화

 

 

내가 찾아간 바다는

배앓이하듯 뒤척이고 있었다.

이 바다에 이르는 길이

왜 하나라고 믿고 있었을까

지구의 표면 어디쯤

낡아 부스러지도록

붙들고 늘어진 그대 옷자락이

뒤틀리는 바다 허리에 감기고

오직 길은 하나

지나온 땅에 놀던 사금파리 끝에

묻어 있던 피

해당화 한송이로 따라와

바다 가까이 피어 있었다

 

다만 하나의 빛깔로, 문학사상사, 1987

 

 


 

신달자(愼達子, 1943~ )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봉헌문자』, 『겨울축제』, 『모순의 방』,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아가』, 『아버지의 빛』 등과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외에 산문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등이 있음. 1964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1998년 '향문화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