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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 / 폭풍
회오리 회오리 바람에 수만 번 돌다가 쓰러지고 싶다
쓰러져서 완전히 박살나고 싶다
한점 가루도 남김 없이 폭풍에 아스라히 날려가서
이승의 끝에 가서 끝에 가서 아 흔적도 없이……
다만 하나의 빛깔로, 문학사상사, 1987
신달자 시인 / 표정(表情)
성냥을 산다. 함봉(緘封)된 성냥곽에서 한개비 성냥을 집어 낸다. 그것을 그어댄다. 불이 붙으며 내 손가락 끝이 타기 시작한다. 함봉(緘封)된 성냥곽에서 끌어내온 또하나의 자신(自身)이 조금씩 재가 되고 있다. 무심히 버려져 있는 타다 버려진 성냥개비 다시는 인화(引火)될 수 없는 버려진 것의 숙명(宿命) 지금 이상하게도 한개비 성냥에 마음이 쏠리고 있다.
봉헌문자, 현대문학사, 1973
신달자 시인 / 해당화
내가 찾아간 바다는 배앓이하듯 뒤척이고 있었다. 이 바다에 이르는 길이 왜 하나라고 믿고 있었을까 지구의 표면 어디쯤 낡아 부스러지도록 붙들고 늘어진 그대 옷자락이 뒤틀리는 바다 허리에 감기고 오직 길은 하나 지나온 땅에 놀던 사금파리 끝에 묻어 있던 피 해당화 한송이로 따라와 바다 가까이 피어 있었다
다만 하나의 빛깔로, 문학사상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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