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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밭고랑 옥수수
내 눈이 너를 보고 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 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 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 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 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 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째 이슬을 털고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 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을 본다 우리도 어느 날, 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 볼 것이다 긴 낫 들고, 긴 낫 내리며 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내는 모습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백설부(白雪賦) 1
몇 번씩이나 철이 바뀌고 잔설(殘雪)이 들을 덮어도 달라지는 것 없는 산이여 올해도 대관령(大關嶺)에서는 산사람들이 겨울을 맞아들이면서 자작나무 불을 피우고
얼어 꺾어지는 가지와 가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하늘에는 별이, 별에는 눈이, 눈에는 산사람들의 꿈이 결빙하여 얼어터지는 소리 그 소리 위로 내리는 밤눈 소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다 제 나름의 소리를 하고 소리들이 모여들어 산을 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사리(事理)를 만든다
언제나 가난하게 하고 언제나 산에서 살게 하는 사리(事理) 어리석은 사리(事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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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엔 새로운 기억과 말을 가지고 평원(平原)으로 가 밤눈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표정에 새겨지던 고난의 희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밤엔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내와 옥중 죄수들 그들의 경험 속에 내포된 벽지의 술집여자 눈먼 아이 그들의 눈과 발 그들의 아픔
그밖에도 그들의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들에게서 사랑으로 화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랑의 밤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한다
사랑이란 있으면서 없는 것 짐승과 인적이 지나도 하얗게 설원(雪原)은 열려 있는 것
□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눈이 내리고 민가(民家)의 불빛 따뜻한 모습으로 길을 비춰주는데 끝없구나 살아서 걸어가는 길 학대받고 걸어가는 길 친구도 이웃도 형제도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어 유랑의 무리로 밀어내어 홀로 걸어가게 하는 길 이다지도 자욱한 눈 속을 걸어가게 하는 길 어느 강가에서 어느 벌판에서 우리들의 유랑은 끝날 것인가 눈뜨지 못하는 넋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들어 어느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폭설이 되어 가지도 지붕도 없이 넘어뜨릴 것인가 걸어가거라 진승(陳勝)의 넋이여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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