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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밭고랑 옥수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최하림 시인 / 밭고랑 옥수수

 

 

내 눈이 너를 보고

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

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

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

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

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

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째 이슬을 털고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

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을 본다

우리도 어느 날, 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

볼 것이다 긴 낫 들고, 긴 낫 내리며

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내는 모습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백설부(白雪賦) 1

 

 

몇 번씩이나 철이 바뀌고 잔설(殘雪)이 들을 덮어도

달라지는 것 없는 산이여

올해도 대관령(大關嶺)에서는 산사람들이

겨울을 맞아들이면서 자작나무 불을 피우고

 

얼어 꺾어지는 가지와 가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하늘에는 별이, 별에는 눈이, 눈에는 산사람들의

꿈이 결빙하여 얼어터지는 소리

그 소리 위로 내리는 밤눈 소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다

제 나름의 소리를 하고

소리들이 모여들어 산을 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사리(事理)를 만든다

 

언제나 가난하게 하고

언제나 산에서 살게 하는

사리(事理) 어리석은 사리(事理)

 

 

이런 밤엔 새로운 기억과 말을 가지고

평원(平原)으로 가 밤눈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표정에 새겨지던 고난의 희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밤엔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내와 옥중 죄수들

그들의 경험 속에 내포된 벽지의 술집여자 눈먼 아이

그들의 눈과 발 그들의 아픔

 

그밖에도 그들의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들에게서 사랑으로 화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랑의 밤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한다

 

사랑이란 있으면서 없는 것

짐승과 인적이 지나도 하얗게 설원(雪原)은 열려 있는 것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눈이 내리고

민가(民家)의 불빛 따뜻한 모습으로 길을 비춰주는데

끝없구나 살아서 걸어가는 길

학대받고 걸어가는 길

친구도 이웃도 형제도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어

유랑의 무리로 밀어내어

홀로 걸어가게 하는 길

이다지도 자욱한 눈 속을

걸어가게 하는 길

어느 강가에서 어느 벌판에서

우리들의 유랑은 끝날 것인가

눈뜨지 못하는 넋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들어

어느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폭설이 되어

가지도 지붕도 없이 넘어뜨릴 것인가

걸어가거라 진승(陳勝)의 넋이여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