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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세속도시의 즐거움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최승호 시인 / 세속도시의 즐거움 1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 없는 몸뚱이로 팔려 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환(幻)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과

환(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 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 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환(幻)인 줄 알면서 나는 환(幻)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환(幻)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세속도시의 즐거움 2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 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