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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밤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신경림 시인 / 밤길

 

 

강 하나 건너왔네 손도 몸도 내어주고

갯비린내 벽에 쩌른 엿도가집 행랑방

감나무 빈 가지 된서리에 떨면서

내 여자 몸 무거워 뒤채는 그믐밤

고개를 넘어섰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 그 새벽도

못 박힌 손바닥에 팔자로 접어뒀네

내 여자 숨이 차서 돌아눕는 시린 외풍

험한 산길 지나왔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

빈내기 화투 소리 늦도록 시끄러운

내 여자 내 걱정에 피말리는 한자정

강 하나 더 건넜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험한 산길 또 지났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북으로 간 친구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골마루에서 벌도 같이 서고

깊드리에서 메뚜기도 함께 잡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할퀴고 꼬집고 깨물면서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큰 아이들의 꼬드김 때문에

 

우리는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서로 붙안고 딩굴었구나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눈과 귀가 찢어져 도깨비춤 추었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이간질에 넘어가

꼬임수에 빠져서 아우성에 넋이 나가

 

눈에 핏발 세우고 이 뿌드득 갈았구나

힘센 아이들한테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발길질을 배우고 주먹질을 배웠구나

쇠꼬챙이 얻어 품속에 감췄구나

 

고샅에서 모퉁이에서 바위너설에서

마주치면 찌르고 할퀴었구나

숫돌에 벽돌짝에 쇠꼬챙이 갈았구나

그리고는 우리는 헤어졌다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전쟁에 쫓겨서 죽음을 피해서

 

쇠꼬챙이 대신 어느새 우리 손에는

총과 칼이 쥐어져 있구나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웠구나

쏘고 찌르고 죽였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으름장에 속아서

음흉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 용심 때문에

 

우리는 의좋은 친구였는데

땅 끝 하늘 끝까지 같이 가자던 친구였는데

 

이빨 뿌드득 갈며 노려보고 서 있었구나

친구의 피로 얼룩진

부끄러운 주먹 휘두르며 날뛰었구나

앞곤두 뒷곤두에 외발걸음으로 설쳤구나

 

이승 저승 험한 고개도

함께 넘자던 친구였는데

죽살이라 돌밭길도

발 맞추어 넘자던 친구였는데

 

크고 힘센 아이들의 눈웃음에 넘어가

아우성 손뼉 소리에 얼마저 빼앗겨

 

가진 것 모두 내주었구나

우리 것 모두 빼앗겼구나

발길질에 주먹질 총질에 칼질만 배웠구나

그러는 사이 삼십 년이 갔구나

사십 년이 갔구나

 

이제는 서로 눈에 눈물 그득 담고

바라보고 서 있구나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구나

 

힘센 아이들한테서 얻은 쇠꼬챙이 버리는구나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배운

발길질을 주먹질을 버리는구나

몸에 밴 것 몸에 걸친 것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을 팽개치는구나

손에 얼룩진 피 서로의 입김으로 닦는구나

찢어지고 깨어진 눈과 귀에 입맞추는구나

부러지고 꺾어진 머리에 뼈에 입맞추는구나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따지기때 풀개떡도 나눠 먹고

장마 지나 도랑뒤짐도 함께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크고 힘센 나라들의 장난질에 넘어가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