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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면민회(面民會)의 날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송수권 시인 / 면민회(面民會)의 날

 

 

우리 청산포 사람들

죽지 않고 살다 보면 꼭두 일년에 한 번씩은

이렇게들 만나는군.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는데

우리 죽지 않고 살아 만나는 게 이게 어딘가

철수, 용복이, 상철이, 또 내 아는 국민학교 동창들

갓 20대 안팎으로 여드름을 달고 와서

어른이 되고 호주가 되고

대물림 끝에 외톨박이로 떠돌던 놈들,

이젠 제법 출세도 했다.

희끗한 머리에 장군이 되고 사장이 되고

과장, 계장, 주사 하다못해

교회당 종지기 노인의 아들이었던

끝남이도 어엿한 목사가 되었다.

 

우리 청산포 사람들,

창경원의 벚꽃이 함빡 구름처럼 피는 날

명함을 박지 못한 놈들만 구석지에 모여

언제나 기가 꺾였다.

저희들끼리 키득거리고 술잔을 엎었다.

가설무대에서 마이크가 울고

삼류 가수보다 못한 굳세어라 금순이가 울고

흥남 부두에 눈발이 쳤다.

새로 바뀐 전화번호를 적고 번지수를 건네 받다 보면

새로 끼인 얼굴도 한둘,

산 속의 댕댕이넝쿨처럼 모진 인연들만 얽히고 설켰다.

이잣돈에 차용증 재판건이 나오고

저희들끼리 치고 받았다.

 

우리 청산포 사람들

막판엔 면장이 나서서 인사말에

우리 청산포 아바이들, 힘주어 수십 번도 더 들먹거렸고

언제나 그랬듯이 총무란 작자가

회관건립기금 기부자 명단을 호명하면

코빼기도 안 보인 장군이다 사장이다

출세한 놈들의 이름자만 거드름을 피웠다.

 

이 모임도 이젠 시들해졌군

누가 탄식을 했고

변질됐어 종간나새끼들!

누가 맞받아 응수를 했다.

 

아, 결국은 조금씩 취해서 돌아오는 길

못난 놈들만 고향냄새를 풀어 놓고 돌아오는 밤길

해마다 이맘때면 구로공단 막바지 언덕길엔

하늘 높이 둥근 달이 떠서

내 고향 성천강 물소리만 귀에 부서졌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