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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태주 시인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나태주 시인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 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 트고 있다, 다시 눈 트고 있다.

장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고 있다.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 땅거미

 

 

숙직하러 가는 길이다,

시절은 꽃철인데 바람은 목에 차고

나무들이 일제히 머리를 모은 서쪽 하늘가

구름 한 조각 쫓겨나와 울고 있다.

버려진 헌 고무신짝인 양 울고 있다.

 

아이까지 셋 낳아 기르던 여자 나이 서른둘에

속아서 합의이혼하고 맨몸으로 쫓겨난

내 처형 같은 구름이다.

 

아닌게아니라 발밑에 채이는 이 땅거미는

쫓겨난 여자, 내 처형을 시방쯤

골목길에 서성이게 하는 어둠일 게다.

 

젖먹이 아이들 잊지 못하여

쫓겨난 집 대문간에서 발버둥치며 발버둥치며

빡빡하여 잘 나오지도 않는 딸꾹질 울음을 울게 하는

어둠일 게다.

한 떼의 모가지 잘린 어둠일 게다.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를 비롯,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과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동화집 『외톨이』 등이 있음.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화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