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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 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 트고 있다, 다시 눈 트고 있다. 장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고 있다.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 땅거미
숙직하러 가는 길이다, 시절은 꽃철인데 바람은 목에 차고 나무들이 일제히 머리를 모은 서쪽 하늘가 구름 한 조각 쫓겨나와 울고 있다. 버려진 헌 고무신짝인 양 울고 있다.
아이까지 셋 낳아 기르던 여자 나이 서른둘에 속아서 합의이혼하고 맨몸으로 쫓겨난 내 처형 같은 구름이다.
아닌게아니라 발밑에 채이는 이 땅거미는 쫓겨난 여자, 내 처형을 시방쯤 골목길에 서성이게 하는 어둠일 게다.
젖먹이 아이들 잊지 못하여 쫓겨난 집 대문간에서 발버둥치며 발버둥치며 빡빡하여 잘 나오지도 않는 딸꾹질 울음을 울게 하는 어둠일 게다. 한 떼의 모가지 잘린 어둠일 게다.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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