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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슬픔으로 가는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정호승 시인 / 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슬픔은 누구인가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生)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生)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 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숲으로 가자.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