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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베드로 2
빌로드같이 검은 밤을 빠져나와 새벽 기슭에 이른 것은 나도 알 수 없는 격정 속에서였다 공기가 사납게 출렁거리고 길이란 길들은 다들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걸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 어떤 사물은 그리움이고 어떤 사물은 사랑이지 않았으며 뉴스같이 맥빠진 언덕과 마루를 올라도 먼 산을 보아도
머잖아 내릴 눈처럼 설레지 않았다 서천군 서천면 서천리 그 이상한 집 뜨락에서 모든 것들은 죽음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베드로 3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친숙한 중량천으로 화물차량이 덜커덩 덜커덩 가고 천막이 흔들린다 카키색 잠바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천막을 밀고 나와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목운동을 하고 아직도 십자가가 빛나는 교회 층계에 주저앉는다 손바닥만한 마당의 사루비아가 불탄다 잠바는 보는 둥 마는 둥 꽃밭에 침을 칙칙 뱉고 팔팔을 입에 물고 바지를 털고 일어선다 천천히 전망 좋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압구정동으로 갈까 이태원으로 갈까 다시 침을 뱉고 하늘을 보고 휘파람 불며 언덕으로 내려간다 천막 문을 열고 빨간 스웨터가 잠바를 본다 잡초가 때마침 바람에 사납게 날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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