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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택 시인 / 파리 잡기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김기택 시인 / 파리 잡기

 

 

  파리채를 높이 들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파리와 모기 날갯짓 소리는

  귓구멍을 찌르고 피를 간질이고

  쓸데없이 힘을 한데모아 정신을 집중하게 한다

  멍청하게 점 하나 선 하나에 정신통일하게 한다

 

  날개 있는 파리가 잡혀주지 않으면

  날개 없는 파리채는 파리를 잡을 수 없다

  가끔 인심 쓰듯 파리는 알맞은 사정거리에 와 준다

  살갗의 소름을 간질이던 날개와 털다리가

  순순히 으깨어지러 와준다

 

  파리채가 파리를 겨냥했을 때

 

  파리는 나처럼

  잠시 후에 닥칠 일을 하얗게 모르고 있었다

  명상으로 모든 동작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때가 놈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이미 내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렸을 때

  콧구멍으로 숨 쉬는 회수만큼

  치욕이 내 몸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을 때

  그 치욕을 판 대가로 시 몇 편 쓰고 문학상 받았을 때

 

  파리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수천 년 단련된 민첩함으로 바닥을 박차고 떠올랐지만

  날개가 전혀 쓸모가 없을 만큼

  파리와 파리채 사이는 결정적으로 좁혀져 있었다

  나는 고르고 평온하게 숨 쉬고 있었는데

  왜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었다

  발모제를 뿌려도 점점 넓어지는 대머리가

  제 무게로 고개를 꺾으며 자꾸 기울어지고 있었다

  털 한 가닥 비듬 하나 어눌한 말 한 마디로도

  나는 꼼짝없이 드러나 버렸고

  도저히 가려지지도 감춰지지도 않았다

 

  으깨어지기 전까지는 세포 하나까지도 온전한

  바로 이때가 삶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월호 발표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소』(문학과지성사, 2005) ,『껌』(문학과지성사, 2009)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1995)과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