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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시인 / 초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건 시인이었지 시인은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수백의 계절을 걸어서 왔다고 말했어 물론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의 스승과 친구와 후배와 자식뻘 되는 또 후배들의 무려 백 년 동안의 시상식에 참석하느라 나는 죽는 것도 까먹었지 뭐야 시인은 누구든 용서하기 싫어졌다고 말한 후 돌연 가방 속에서 한 뭉치 원고를 꺼내 읽기 시작했지 거울와의 비밀 연애 그 지루한 분노의 시를 백 년 동안의 독서와 필사적인 필사를 그동안 무처럼 갉아 먹은 기억을 무말랭이처럼 바닥에 쏟아져 말라가는 언어를 황금 재즈 시대 트럼펫처럼 무대 위에서만 빛나는 비유들을 다 버리고 나서도 겨울밤 두더지처럼 늘어나는 슬픔들에 대해 시인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 너는 하품을 참으며 상투적인 교양 소설의 독자처럼 차근차근 말해주었어 거울 속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물만 줘도 쑥쑥 자라 어른이 되지 않고 언어는 불평등의 얼음판 위를 날랜 스케이트 날처럼 휙휙 가르지 않으니 유사 낭만 시대의 별처럼 빛나지 않아도 좋아 나의 시인이여, 이제 그만 죽어도 된단다, 너는 다정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그는 울면서 돌아갔지 내일이면 집이 조금 가벼워지리라 창밖엔 산뜻한 구름, 너는 허공에다 줄을 건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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