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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북한강행 3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신경림 시인 / 북한강행 3

 

 

왜 날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가

팔다리 잘려나간 험한 몸통으로

원수 앞에서 뒤뚱걸음치게 하는가

용서하라고 모든 걸 용서하라고 하는가

목에 들여댄 칼 앞에서 웃으라는가

 

강바람 산바람 매운 줄 너는 모른다

온갖 새 울음 짐승 울음 서러운 줄 너는 모른다

욕지거리 발길질 아픈 줄도 너는 모른다

서른 해 그 긴 죽음 지겨운 줄 너는 모른다

 

왜 그 모든 걸 다 잊으라는가

인연 없는 낯선 이의 팔에 매달려

우쭐우쭐 허재비춤*을 추게 하는가

원수들의 큰 웃음소리 속에서

원통한 날 왜 두 번 죽게 하는가

 

내 누웠던 강가로 되보내다오

그 차디찬 흙 속으로 되보내다오

밤마다 팔다리 없는 몸통 흙 털고 일어나

 

천리 만리 원수 찾아 날아가리니

원수의 칼날 앞에서 억지로 웃는 내 입에

날 선 낫 한 자루 물린 걸 너는 모른다

 

* 허재비춤: 젊은 원혼을 짝지어줄 때 하는 허재비굿 속의 춤의 하나.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비 오는 날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망산 그 한 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빛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