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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북한강행 3
왜 날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가 팔다리 잘려나간 험한 몸통으로 원수 앞에서 뒤뚱걸음치게 하는가 용서하라고 모든 걸 용서하라고 하는가 목에 들여댄 칼 앞에서 웃으라는가
강바람 산바람 매운 줄 너는 모른다 온갖 새 울음 짐승 울음 서러운 줄 너는 모른다 욕지거리 발길질 아픈 줄도 너는 모른다 서른 해 그 긴 죽음 지겨운 줄 너는 모른다
왜 그 모든 걸 다 잊으라는가 인연 없는 낯선 이의 팔에 매달려 우쭐우쭐 허재비춤*을 추게 하는가 원수들의 큰 웃음소리 속에서 원통한 날 왜 두 번 죽게 하는가
내 누웠던 강가로 되보내다오 그 차디찬 흙 속으로 되보내다오 밤마다 팔다리 없는 몸통 흙 털고 일어나
천리 만리 원수 찾아 날아가리니 원수의 칼날 앞에서 억지로 웃는 내 입에 날 선 낫 한 자루 물린 걸 너는 모른다
* 허재비춤: 젊은 원혼을 짝지어줄 때 하는 허재비굿 속의 춤의 하나.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비 오는 날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망산 그 한 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빛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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