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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그 나라에서 온 엽서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김경미 시인 / 그 나라에서 온 엽서

 

 

  몇 년만인지요

  이곳엔

  나무와 공원과 연두색 이삼층 목조집들만 가득합니다

  아래층엔 조용하고 깨끗한 헌책방

  다락방 숙소엔 하늘이 보이는 격자천창과

  녹색의 흔들의자가 있습니다

  바로크풍의 책상과 오렌지 갓스탠드도 세 개나 있습니다

 

  천둥번개 치던 날 당신의 전화벨소리 그치지 않고

  저 아득한 원시로부터 마음 사냥을 나온 공포도

  그치질 않아

  아름다운 방 버려두고 남의 방문 앞 어둠속에서

  한강 근처에서 봤던 당신의 가을,

  그 가을들을 어떻게 다 건넜던가, 꼽아봤습니다

 

  좋아하지 않던 단맛이 생존에 필요하단 걸 느껴

  비스킷과 맥주를 사왔습니다

  급히 먹고 난 비스킷 겉봉엔 익혀 먹으라고 써있고

  맥주병에는 쓴 약이 몸에 달다 써있었습니다

  한 늙은 백인 아내는 흑인 남편보다 일주일 먼저 떠나면서

  내 남자를 기내용 트렁크에 넣어 데려가고 싶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풀밭 토끼가 도망가지 않으므로 사람쪽에서 그만

  도망을 다닙니다

  매일 고양이를 보러 가는 건 유행이어서가 아니라

  왠일인지 당신이 드물게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창틀 화분에 물 주는 일보다

  달력에 물 주는 일이 더 이로울 듯하지만

 

  어떻게 비사교적인 당신과 겹쳐버렸는지 추억의

  유리창 너머 기웃대려 오늘은 <myself>,

  서울의 식당 물컵 같은 이름의 펍에 갑니다 눈발인지

  세월인지 맞으며 초저녁부터 가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0년 봄호 발표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 1989)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5)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1)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 등과 기타 서적으로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 등이 있음.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