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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태주 시인 / 변방의 풀잎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나태주 시인 / 변방의 풀잎

 

 

1

 

아침에 잠깨어

뒤뜰에 나가보면

나보다 먼저 잠깬 풀잎,

풀잎 끝 이슬.

 

부신 햇살에

목욕을 하고

쏴, 쏴, 물 끼얹는 소리를 내며

목욕을 하고,

 

대숲에서

이슬방울을 털며 쏟아지는

아침 참새떼…….

 

빛이 모이는 곳에

새소리들도 모여서

어쩜 그건 쨍그랑, 쨍그랑,

햇빛 깨어지는 소리로

 

내 어지러운 지난밤

꿈을 씻는다.

나의 아침 하루

더딘 출범의 돛폭을 단다.

 

2

 

사람이 싫어

사람냄새가 싫어

인가(人家) 멀리

사람 발자욱 끊인 곳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잎.

무성하게 자라나는 고요.

 

사람이 싫어

사람냄새가 싫어

인가(人家) 멀리

우거진 풀숲에

짜아하니 흩어진

가을 풀벌레 울음.

 

물이 아니어도

물같이 스미는 마음아.

달빛이 아니어도

달빛같이 부서져 반짝이는 마음아.

 

도라지꽃 싸리꽃 우거진 곳에

쓰러져 통곡하는 우리들 청춘,

우리들 젊은 날의 사랑아.

 

3

 

외할아버지 일찍

저승으로 보내시고

시집보낸 외동딸이 오는가,

외손자들 오는가,

 

문밖에 서성이는 나뭇잎 하나에도

소스라쳐 놀래시는 귀[耳]가 커서

 

희끗희끗 흰구름 사위어지는

언덕에 올라

 

먼먼 들길만 보며

들길에 오가는 낯선 바람 그림자들만 기웃거리며

 

여린 풀잎에 몸을 기대어 한평생

외할머니는

그렇게 사시는 분.

 

한 줄기 풀벌레 울음소리에 몸을 기대어

여린 풀잎 그림자에 몸을 숨기어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평생을 사시는 분.

 

4

 

해가 진 지 오래도록

대숲에서 지즐거리는

산새들.

 

아마

산새들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따스한 햇살이 남아 있나보오.

빛나는 노을 조각이라도 남아 있나보오.

 

해가 지자

더욱 요란스레

풀벌레 울음소리

대숲의 아랫도릴 흔들고

 

대숲의 발뿌릴 적시는

찬 저녁이슬,

 

아마

내 가슴 속에도 아직은

따스한 노래가 남아 흐르나보오.

정다운 얘기가 남아 속삭이나보오.

 

5

 

곱게 쓸리는 억새풀꽃 따라 가을바람 따라

혼자 휘파람 불며 가을길을 가노라면

어느새 나는 꿈꾸어라,

옥수숫대 수숫대 어우러진 풀덤불 사이

 

밤이 와도 불이 켜지지 않는 초가집 한 채.

사람들 비우고 떠나간 오두막집 한 채.

 

갈꽃 향기에 젖어

가을 풀벌레 울음소리에 젖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그 오두막.

 

거기 살던 사람들은 떠났어도 가을은 와서

마당 앞 옹달샘은 맑게 솟아

슬픈 눈을 뜨고 있어라.

 

거기 살던 사람들은 떠났어도 가을은 와서

뒤뜰에 밤나무 송이 벌고

앞뜰에 감나무 감알이 여물었어라.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를 비롯,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과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동화집 『외톨이』 등이 있음.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화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